친애하는 그놈

유니콘은 없다

by 이너프

이리 뛰고 저리 치이던 토크 프로그램의 막내 작가 시절의 일이다. 하나 같이 잘난 척만 해대는 방송국 놈들 사이에서 아주 드물게 인품과 능력을 겸비한, 유니콘 같은 팀장님이 있었다. 개와 고양이처럼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는 피디와 작가 사이가 삐걱대지 않도록 하는 중재자였고 우리 팀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총대를 메고 싸우는 의리파였다. 그뿐인가. 팀장님은 막내일수록 기를 살려줘야 한다며 내 작은 성과에도 칭찬과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든든한 상사 덕분에 팍팍한 방송국 생활이 조금은 말랑말랑 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팀은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이슈가 된 배우 A 씨를 단독으로 촬영할 기회를 얻었다. 제작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유능한 리더의 진두지휘 아래 환상의 팀워크를 선보이며 마감까지 무사히 마쳤다. 방송을 하루 앞둔 시점,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 촬영 비하인드며 현장 사진 등을 담은 보도자료 배포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보도자료를 쓰는 건, 물론 막내 작가의 몫이다. '프로젝트를 마치자마자 또 글을 쓴다고?' 싶을 수도 있지만, 아직 대본을 쓰지 못하는 1년 차 방송 작가에게 보도자료는 온전한 ‘내 글’을 세상에 선보일 유일한 기회였다. 잘 쓰인 보도자료는 기사로 재탄생되고,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도 하므로 늘 심혈을 기울여 써야 했다. 그날도 몇 번을 수정한 끝에 팀장님의 컨펌을 얻어 야심 차게 전송 버튼을 클릭했다.


얼마 후, 배우 A 씨의 이름이 인기 검색어 1위에 오르더니 온라인 기사가 속속 뜨기 시작했다. 그때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나는 물색없이 셀프 칭찬만 늘어놓으며 감격하고 있었다. 그때 배우 A 씨의 소속사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작가님! 이거 너무 하잖아요!”

매니저의 목소리가 잔뜩 격앙되어 있었다. 연예부 기자들의 전화도 빗발쳤다.

"A 씨가 보톡스를 맞았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랬다. 털털한 성격의 A 씨가 보톡스를 맞고 효과를 보았다고 오프 더 레코드로 털어놓은 것을 방송국에서 보도자료까지 내어 동네방네 소문을 낸 것이다. 성형수술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요즘과 달리, 당시는 연예인이 피부과에 다니는 것도 쉬쉬하던 시절이었으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자 눈앞이 아득해지고 손발이 덜덜 떨렸다.


“전화받지 마. 내가 응대할게"


발만 동동 구르는 내 앞에 등장한 팀장님은 흡사 구원투수 같았다. 전화통을 붙들고 나 대신 입이 마르고 닳도록 해명하는 팀장님을 보며 미안함과 측은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런데, 언뜻 들리는 통화 내용에 피가 식는 듯한 기분이었다.


“막내 작가가 저 모르게 보도자료를 기자들에게 뿌렸더라고요. 미친 거죠! 저도 어이가 없습니다.”


그래도 대외용 변명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통화를 마친 팀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물었다.

"보도자료에 A 씨가 보톡스 시술받았다는 이야기는 도대체 왜 쓴 거야?"


아... 말로 하는 어퍼컷으로도 입안에서 피맛이 돌 수 있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팀장님이 몇 번이나 읽고 컨펌하신 거잖아요! 잘 썼다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그때의 난 조목조목 따져 물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팀장님은 나를 어두운 비상구 계단으로 데려가더니 당장 휴대폰을 꺼놓고 '잠수를 타라'고 지시했다. 미친 작가에서 도망자로 업그레이드로라도 시켜주려는 것일까. 몸부림치며 꼬리 자르기에 급급한 그의 모습이 마치 도마뱀처럼 보였다.


세월이 흘러 팀장의 입장이 되니 그날의 일이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조금 보태서 이야기하자면, 팀장님은 좋은 사람고만 싶은 ‘서툰 리더'였던 거 같다. 늘 결정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리더의 자리가 주는 중압감이 반듯했던 그를 비틀어놓았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나는 그와는 다른 팀장이 되었다. 그날 본 팀장님의 민낯과 믿었던 어른에게 배신당한 어두운 계단의 기억을 떠올리며 ‘책임’이라는 단어에 무게를 더 두게 된 것이다. 팀장이 팀원보다 월급을 더 받는 이유에 ‘책임값’이 포함되어 것도 잊지 않으려 한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에는 유니콘 같은 멋진 리더의 환상을 품고 있다. 늘 다짐은 출발선에서 일직선으로 향하지만, 오늘도 위로 아래로 눈치를 살피며 갈지(之) 자로 걸어가고 있다.




* 브런치북으로 옮기면서 재발행한 글입니다.

이미 이 글을 읽으신 분들께는 진심으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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