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몸 모시려다 천한 몸 되었습니다

by 이너프

그것은 그냥 가죽 가방이 아니었다. 0이 몇 개인지 세다 포기하게 만드는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돈 벌어서 샀냐고? 그럴 리가. 패션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남들은 나를 ‘작가님’이라 불러주었지만, 그 고귀한 명품백 앞에서는 그 예우도 사치였다.


패션 프로그램의 본질은 판타지를 채우는 것이라 했던가. 그래서인지 내게는 대본 쓰는 것보다 ‘비싼 가방을 무사히 모셔오는 일’이 제일 중요했다. 브랜드 협조는 기본, 청담동 쇼룸에 직접 픽업을 가야 한다. 초반에는 퀵 서비스를 이용했지만, 배송 중 미세한 사고가 반복되자 브랜드 측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작가 직접 픽업이요.”


그날, 나는 한 장의 종이 앞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대여 서약서

문구는 간결했고, 그래서 더 잔인했다.


[스크래치, 오염, 분실 시 제작진 전액 배상]


볼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 한 달 치 페이는 물론, 어쩌면 반년 치 인생이 저 가방 손잡이에 난 실금 하나로 날아갈 수도 있었다. 서명을 마친 순간, 내 신분은 ‘작가’에서 ‘상전 모시는 사람’으로 조용히 강등되었다.


남들은 명품 가방을 들면 발걸음이 가벼워진다는데, 나는 거의 폭탄 제거반이었다. 가방을 신생아처럼 품에 안고 지하철에 올랐다. 누군가 한 발짝만 가까워져도 미어캣처럼 고개가 튀어 올라갔고, 문이 열릴 때마다 가방을 등 뒤로 숨기며 인간 방패를 자처했다. 온몸의 땀구멍이 동시에 열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날 나는 사람보다 가방을 더 보호했다.


진짜 문제는 촬영장에서 시작됐다. 조명기가 가방 근처로 이동할 때마다 동공에 지진이 났고, 모델이 가방을 ‘툭’ 내려놓는 순간 목구멍까지 비명이 차올랐다. 스크래치 방지용 장갑까지 낀 손으로 가방의 각을 잡으려는데,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작가님, 손 좀 가만히 있어 봐요!”


카메라 감독의 외침이 들렸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저 가방에 문제가 생기는 순간, 내 인생의 유통기한도 함께 끝날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수발들다 보니, 문득 웃음이 났다. 나는 지금 작가가 아니라 가방을 모시러 온 사람이었다.


촬영이 끝나고, 가방을 다시 반납하러 가는 길. 내 마음 어딘가에는 지워지지 않는 스크래치가 하나 남았다. 명품이 대단한 게 아니라, 그 앞에서 스스로를 작게 만든 내 마음이 더 문제였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오늘도 나는 낡은 천 가방을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진다. 이 가방은 나를 협박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훨씬 편하게 들린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언젠가는 가방을 ‘모시는’ 사람이 아니라,

명품백 그까이게 뭐라고! 하고 콧방귀를 '흥'하고 뀌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비싼 것 앞에서도 괜히 조심스러워지지 않고, 가격표 대신 나를 믿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면 아마 세상에 던지지 못할 건 별로 없을 것 같다.


물론 그날이 와도,

나는 여전히 가방을 아무 데나 던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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