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조심하라!
생방송 작가의 세계에는 세 가지 ‘국룰’이 존재한다.
첫째, 방송 전 반드시 대본을 미리 출력할 것.
둘째, 생방송 중 정적이 4초 이상 흐르지 않게 할 것.
셋째, 화면에 작가가 등장하지 말 것.
이 세 가지만 사수해도 시청률과 상관없이 최소한 ‘무사 귀환’은 했다는 평을 듣는다.
생방송 프로그램 5년 차. 스스로를 ‘베테랑’이라 부르던 시절이었다. 그 규칙들이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을 정도였다. 적어도 그날, 생방송 현장으로 달려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운명의 여신은 늘 가장 교만한 순간에 뒤통수를 친다. 대본을 쓰던 노트북은 약 올리듯 멈춰 섰고,
복사기는 종이를 씹어 삼키며 침묵시위에 들어갔다. 결국 나는 출력하지 못한 대본 뒷부분을 후배에게
맡긴 채, 빈 종이 뭉치만 들고 현장으로 전력 질주했다.
스튜디오가 아닌 곳에서 생방송을 진행하다 보니 현장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MC 앞에서 오프닝 멘트를 수기로 갈겨써 한 장씩 전달했다.
드라마에서 배우들이 받는다는 ‘쪽대본’. 나는 그걸 생방송 중에 실시간으로 쓰고 있었다.
다행히 노련한 MC들은 내 조악한 필기를 찰떡같이 읽어 내려갔다. 안도의 숨을 돌리기도 전에 일이 터졌다.
“배우님이 차가 막혀서 이제 도착한대요!”
역시 시련은 고독하게 오지 않는다. 주문하지도 않은 ‘재앙 패키지’가 도착했다.
마지막 코너를 소개할 출연자가 늦게 도착한 것이다. 리딩 한 번 못 해본 배우는 그대로 무대 위로 던져졌다. 다행히 애드리브는 좋았으나, 진짜 지옥은 VCR 내레이션에서 열렸다. 하필 그때, 신의 장난처럼 강풍이 불어닥쳤다. 배우의 손에 들려 있던 대본이 날개라도 단 듯 공중으로 흩어졌다. 다행히 송출 화면은 VCR로 넘어가 있었지만, 대본이 허공을 유영하는 꼴은 내 눈앞에서만 잔인한 슬로우 모션으로 상영됐다.
“주여!”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졌지만, 방송은 무자비하게 흘러갔다. 흩어진 대본을 줍고 정신없이 순서를 맞추는
사이, 생방송의 금기인 ‘마의 4초’가 정적 속에 증발해 버렸다. 브라운관 너머로는 기대했던 배우의 감미로운 목소리 대신, “윙~ 윙~” 하는 처량한 바람 소리만 송출됐다.
그러나 비극의 하이라이트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특집 생방송의 엔딩은 20마리의 말이 광장을 질주하는 장관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동선을 아는 건 나뿐이었고, 나는 인터컴을 낀 채 야생의 현장으로 투입됐다.
이미 기수들과 수차례 합을 맞췄지만, 내가 간과한 절대적 사실이 하나 있었다. ‘말은 짐승’이라는 점이다.
“지금! 지금 뛰라고!”
내 외침을 비웃듯 말들은 각자의 세계에 심취해 카메라 밖으로 흩어졌다. 리허설은 말들의 콧방귀 한 번에 무용지물이 됐다. 이대로라면 야심 차게 준비한 엔딩 그림은 망한다. 나는 이성을 내려놓고 말 떼 사이로 뛰어들었다. “이럇!” 소리를 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그 순간, 카메라는 비정하게도 나를 포착했다. 화려한 조명 대신 먼지 구덩이 속에서 퀭한 눈으로 말들을 몰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전국으로 생중계됐다.
방송으로 나를 확인한 지인들은 싸이의 강남스타일 춤을 추는 광인처럼 보였다고 한다. 엔딩 크레딧에는 내 이름 석 자가 우아하게 올라가고 있었지만, 화면 속엔 이름 대신 내 처참한 몰골이 박제되고 있었다.
국룰 1, 2, 3조를 단 한 시간 만에 완벽하게 격파한 날. 나는 그날 이후 ‘베테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세 가지를 기억하기로 했다.
말(Horse) 조심.
바람 조심.
그리고 무엇보다 내 오만함을 조심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