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수영 없는 날을 버티는 방법 2

by 속삭이는 물결

영화 <4등>


이거 뭔데 캐스팅이 이렇게 화려하냐. 지금까지 본 수영을 다룬 콘텐츠 중에서는 최고로 친다. (아래는 스포 포함)


수영에 관한 이야기 같지만, 궁극적으로 스포츠와 교육에 관한 이야기다. 스포츠계에서 일어나는 때로는 부조리한 권력의 관계, 의지의 주체가 뒤바뀌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흔한 일들을, 완전히 잘못된 일로 몰고 가지 않으면서, 나름의 사정을 이해해주면서, 청소년의 눈으로 조용히 관찰하듯 전개되는 영화다. 자신의 잘못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타인의 잘못은 한없이 억울해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치사한 면도 잘 담았다. 모두가 그러고 살지 그래.


일단 이 영화에서 가장 주의할 점은 엄마 캐릭터다. 장남이 메달 따는 걸 보고 싶어 극성인 엄마가 나올 때마다 머리가 띵하고 짜증 나서 돌아버릴 것 같다. 이 엄마 욕만 한 바가지 하고 싶다. 수영에 재능은 있는 것 같은데 맨날 4등만 하는 아들을 키워보려고 갑자기 낯선 교회에 나가서 헌금을 하고 교회 안주인에게 잘 보여서 실력 있는 코치를 소개받는다. (그러곤 나중에 절에 가서 불공을 올리며 절을 한다. 엄마가 이렇게나 나서면 자식은 좀처럼 나아가질 않는다.)


그런데 이 천재 코치는 꼴통이어서 어린 시절 연습을 일주일 빼먹고 도박을 한 적도 있다. 한참 자리를 비우다 돌아간 수영장에서 코치가 빠따로 100회 때리려 하자, 그동안 한 번도 맞은 적 없이 지내던 놈이라 견디질 못하고 17대쯤 맞다가 수영을 때려치우겠다고 내지르곤 수영장을 나온다. 억울함과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다, 얼마 전 미성년자 주제에 포장마차에 가서 한 잔 때리다 만난 체육 기자가 생각난 그는 전화를 건다. 코치가 자신을 때렸다며 기사로 내달라고. 그 시대에 그 정도 체벌이 문제가 됐을까? 잘 풀리진 않는다. 그런데 그 기자가 주인공의 아빠다. 과거 회상 장면은 흑백으로 나온다.


아빠는 아내의 극성스러움을 잘 알고 있지만 나서서 말리지도 다른 무언가를 하지도 않는 방관자에 가깝다. 힘들면 그냥 수영을 그만두라고만 하는데, 그게 그로서는 최선의 도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직장 동료에겐 아들 자랑을 할지라도. 그런데 웃긴 건 아빠야말로 체육계 인맥이 화려할 사람인데, 왜 직접 코치를 알아봐 주지 않는지다. 엄마 인맥보다 나을 텐데..


아무튼 준호는 새로운 코치를 만나 수영을 하려 한다. 그런데 처음 만난 날 카페에서 호통만 치던 코치 광수는 훈련 첫날도 피시방, 둘째 날도 피시방, 늘 피시방에서 산다. 준호는 처음엔 수영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게임을 즐기지만, 대회가 한 달 뒤인데 점점 수영과 멀어지는 상황에 불만을 터뜨린다. 결국 성질 더러운 광수에게 literally 질질 끌려가다 자신이 수영하는 걸 한 번이라도 봐달라고 외친다. 그래서 본다. 준호의 수영하는 장면은 아름답고 낭만적인 고결한 미장센으로 연출된다. 광수와 체육관장은 그 모습을 보고, ‘아 쟤는 될 애구나’라는 걸 깨닫는다.


광수는 그날 밤 준호에게 전화해, 너 영법이 참 예쁘더라며, 내일부터 새벽 훈련을 하자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훈련. 그런데 웬걸, 준호가 집중력을 잃거나 실수를 할 때마다 광수는 매를 든다. 지 맞았다고 억울해할 땐 언제고. 처음 매를 맞고 등이 빨개져서 돌아온 준호를, 엄마는 모른 척한다. 여기서 이 영화 체벌을 옹호하는 건가? 싶어서 황당했다. 엄마는 준호가 맞는 것보다 메달을 더 보고 싶어 한다.


준호는 점점 광수의 권력과 위계에 젖어선 꼼짝도 못 하게 된다. 벌벌 얼면서 복종한다. 탁월한 심리 묘사로 사람이 매를 맞으면 이렇게 된다는 걸 아주 잘 보여준다. 광수는 준호를 때리고 나선 수건으로 몸도 닦아주고 마사지도 해주면서 체벌의 이유를 대고 자신의 매질을 정당화한다. 본인은 어릴 때 잘한다는 이유로 늘 기합에서 제외였고, 남들 맞을 때 강사 휴게실에서 혼자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그래서 나쁜 버릇이 들었고 어떤 선생도 자신을 호되게 매질하고 붙잡지 않았기 때문에 엇나갔으며, 이 때문에 자신의 인생도 잘 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때려주는 건 고마운 일이라고. 완벽한 가스라이팅이다. 도덕성과 윤리 의식을 붙잡는 건 자기 자신의 몫이지, 타인이 매질로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을. 말로도 설명할 수 있는 일을 분노와 체벌로 대신한다는 건 능력 부족을 드러내는 것일 뿐.


그리고 준호는 처음으로 1등에 가까운 2등을 한다. 광수는 2등을 하고 기뻐하는 준호를 찾아가 겨우 2등이 좋으냐며 호통을 치고, 왜 자기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냐며 윽박지른다. 준호는 그날 가족과 행복한 저녁 식사를 한다. 수영을 그만두라던 아빠도 케이크를 사들고 준호의 메달을 축하한다. 그러다 동생의 돌발 발언, 그런데 형은 진짜 맞아서 메달을 딴 거야? 아빠는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고, 그 코치가 예전에 그 김광수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다음 새벽, 아빠는 광수에게 돈봉투라는 당근을 건네며 준호를 때리지 말아 달라고, 다시 매를 들었다간 체벌 사실이 특집 기사로 실리고 수영 연맹 회장이 90도로 숙여 사과하는 꼴을 보여야 할 것이라는 협박의 채찍을 보인다.


광수가 그 말을 들을 리가 없다. 새벽에 몽롱한 준호가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이자 다시 매를 들려고 하는 광수. 엄마의 보호를 일찍이 체념한 준호는 아빠가 나서 준 일을 계기로 체벌이 잘못된 것임을, 아니 체벌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를 맞고 말고는 수영 실력과 관계없다고. 그래서 이제는 맞선다. 맞고 싶지 않습니다. 외치고는 수영복 차림으로 뛰어서 택시를 타고 아빠가 일하는 신문사를 찾아간다. 준호는 결국 수영을 그만두기로 하고, 광수는 준호 아빠의 뒤처리(?)로 체육관에서 잘린다. 광수는 관장에게 승부욕 없는 아이에게 승부욕을 심어주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한다. 관장은 체벌 당시 목격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광수를 돌려보낸다. 아, 이 영화는 체벌을 옹호하지 않는구나, 이제야 안심이 든다. (그러나 그 목격자를 “미스김”이라고 부른다. 90년대인가? 아무리 할아버지라도 요즘 사원을 그렇게 불렀다간 큰일이 나는 것을..)


준호 엄마는 준호의 수영 중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악을 쓴다. 광인이 따로 없다. 도대체 메달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저런 사람은 절대 되지 말아야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준호 엄마는 자신의 광기를 준호 대신 준호 동생에게 쏟기 시작한다. 준호는 자유를 맛보는 듯했다. 그러다 어느 날 준호 동생이 준호의 수영복을 입고 준호의 수경을 쓰고 욕조에서 물놀이를 하다 들킨다. 준호는 광수에게 받은 체벌을 그대로 동생에게 한다. 괴물이 이렇게 탄생하는구나. (나도 이런 경험이 있다, 부모에게 맞은 경험을 그대로 동생에게 되물려주곤 했다. 부모는 그 경험을 조부모에게서 받았겠지.) 그만큼 체벌이 끼치는 악영향이 엄청나다는 걸, 폭력은 폭력으로 대물림된다는 변치 않는 사실을 이 영화는 애쓰지 않는 자세로 차분하게 보여준다.


준호는 다시 수영이 하고 싶어서 밤에 몰래 수영장에 들어가 수영을 즐긴다. 준호의 수영은 늘 아름답고 동심에 가득 찬 판타지로 그려지는데, 이게 이 영화의 백미다. 준호가 수영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진심과 순수함을 잘 그려낸다. 엄마의 강압적인 태도, 코치의 폭력에 가까운 그림자를 벗어나 자유로워진 준호. 그러나 다시 수영을 하고 싶다. 준호은 해장국집을 찾아가 코치에게 자신의 뜻을 전한다. 수영장에서 쫓겨나서 이제 못 가르친다는 광수에게, 준호는 아빠에게 전화해 때리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면 아빠가 다시 조치를 취해줄 것이라고 한다. 광수는 자존심 때문인지 뭔지 준호 아빠에게 한껏 성질만 부리곤 전화를 끊는다. 그러곤 준호에게 너는 혼자서도 메달을 딸 애라고 말한 뒤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준호는 혼자 대회를 나간다. 이번 대회에는 엄마도 동생도 코치도 보이질 않는다. 이들이 카메라 밖 어딘가에 있음을 알지만, 이번에는 오로지 준호의 시점만을 보여준다. 마치 액션캠으로 찍은 것처럼. 물에 들어가서 헤엄치다 나오고, 전광판 속 기록을 확인하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아 걸어가는 상황까지 모두. 준호의 승리를 알아챈 경쟁자들의 시선, 체벌을 연상하는 청소 도구함, 그리고 마침내 준호 자신을 지추는 거울. 이렇게 영화는 마무리된다. 헤엄치는 장면은 홀로 묘기를 부리듯 물을 수직 하향하는 듯한 동작으로 채운다. 수영에 완전히 몰입한 준호의 마음 상태를 표현한 듯하다.


분명 독립 영화 느낌인데 캐스팅도 화려하고 연출도 세련돼 찾아보니 정지우 감독 작품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했다. 상업 영화로는 이미 여러 번 성공한 감독인데, 이 작품을 만들면서 신이 난 게 느껴진다. 준호가 수영을 정말 좋아해서 하는 것처럼, 감독도 이 영화를 정말 좋아해서 만든 것 같다.


광수를 연기한 박해준 배우는 인생 캐릭터를 만난 것 같다. 늘 이 배우의 말투가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세련된 도시 남자 연기할 때마다 어색해 죽을 것 같았는데, 광수가 그냥 찰떡이다. 어색한 서울말 숨길 일도 없고..


준호 역의 유재상 배우는 말해 뭐해, 순수하면서도 갈팡질팡하는 청소년을 너무 잘 표현했다. 진짜 현실 속에 있을 것 같은 실제 준호를 데려다 찍은 것 같다.


어린 광수를 연기한 정가람 배우도 정말 한 인물 한다. 매력이나 가능성에 비해 빛을 잘 못 보는 느낌인데, 좋은 필모 남긴 듯.


영화가 좋아서 말이 너무 많았다..


수영 장면에서 대역은 안 쓴 것 같다.


어쨌든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본받아야 할 점은, 수영을 좋아하는 마음이 최우선이라는 것이다. 다른 어떤 목적보다 진짜로 좋아하는 마음이 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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