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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리께 Aug 19. 2022

달빛에 기대어 쉬는 밤

《Hunza, PAKISTAN》








 히말라야 부근 파키스탄 북부의 카리마바드_Karimabad, 흔히 훈자 마을로 불리는 이곳에 나는 갇혔다. 산사태로 길이 막혀 며칠째 외부와 단절된 이 작은 산악마을은 정말이지 한적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두세 가지. 의도치 않은 이 단순한 생활에 나는 조금씩 동화되고 있었다. 아침이면 지천에 깔린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먹었다. 어차피 내일도 있을 사과였으니 굳이 두 개를 딸 필요도 없었다. 매일 나는 당도 높은 행복을 맛보았다. 낮이면 숙소 뒤로 난 길로 산책을 나섰다. 울타르 빙하를 향하거나 이글네스트 트레킹 코스를 걸었다. 당도해야 하는 도착점 같은 건 의미가 없었으므로 가다가 힘들면 되돌아왔다. 언덕에 앉아 구름의 그림자를 구경하며 하루를 보냈다.

 



 밤이면 나는 야상 침대에 누워 책 속으로 피신했다. 로맹 가리의 단편들을 묶은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네팔의 중고서점에서 한국어 책을 봤을 때의 그 반가움을 나는 기억한다. 책의 모서리가 낡도록 이 책을 들고 다니며 몇 번이고 탐독했다. 요 며칠은 정전이 잦아 아예 촛불을 켜 두고 있다. 촛불의 움직임을 따라 활자가 요동쳤다. 어스름한 빛 속에서 나는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붙잡아서 읽어 내려간다.

 사각사각, 책장 넘어가는 소리... 달그락달그락, 만년설을 훑고 내려온 바람이 맹렬한 기세로 유리를 두들기는 소리... 똑똑똑..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가 방안에 퍼진다. 밤이 깊어지자 나는 촛불을 껐다. 고립된 산악마을에서는 뭐든지 귀했기 때문에 책을 읽을 때가 아니면 초도 아껴야 했다. 창으로 달빛이 들어와 방 깊숙이 비추었다. 나는 뻣뻣한 모직 담요 두 세장을 코 밑까지 끌어올려 덮은 채, 어렴풋이 드러난 천장을 바라보았다. 군데군데 드러난 철근을 보며 나는 페루의 새들을 떠올렸다. 새들은 태평양 연안으로 돌아와 죽곤 했다. 날아오느라 온 힘을 소진해버린 새들은 쓰레기가 되어 해변에 널브러졌다. 새들의 주검에서 로맹 가리는 인생의 쓸쓸함을 봤던 건지, 그 역시 새들처럼 사라져 버렸다. 권총 자살이었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인이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새들을 따라 바다에 몸을 던졌을 때는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있었지만, 로맹 가리에게는 없었다. 그의 인생을 쓸쓸함에서 구해줄 그 무엇도.




 삶은 외로움과 고독이 가득한 단편들의 묶음이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어떤 순간은 외로움이, 어떤 순간엔 고독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다만 고독은 의도적이고 자발적인 고립이란 점에서 외로움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세상으로부터 나를 고립시켜 잠시 쉬어가는 여유를 준다. 이를테면 여기서의 생활처럼, 단순하지만 심심하지 않고, 누구를 만나지 않아도 외롭지 않은, 정서적으로 충만한 여유. 나는 매일 밤을 그렇게 누워서 침묵을 즐기다가 잠들곤 했다. 달빛에 기대 잠시 쉬어가는, 내 생애 가장 소박하고 평화로운 고독의 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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