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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용 Jun 12. 2023

나는 초연해지는 중이다.

"괜찮아요. 이제 나와도 돼요."

수업 중 선생님께서 오늘 캠퍼스에서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으니 쉬는 시간에 함께 나가보자고 하셨다. 

그럼 나도 쇼핑을 좀 해볼까! 나는 지갑을 들고 선생님을 따라나섰다.


등교할 때 무심코 지나쳤었는데 과연 캠퍼스 한쪽구석에서 옷이나 액세서리등을 팔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선생님께서는 미리 봐두셨던지 성큼성큼 가시더니 예쁜 샌들을 20유로에 구입하셨다. 신발상자에는 42유로라고 써져 있었는데 상태가 아주 좋았다.



나는 마음에 드는 바지를 두 개 골라서 임시 탈의실로 사용되는 있는 창고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강의실로 돌아가시며 나더러 너무 늦지 않게 들어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마침내 들어간 탈의실.

음... 유리로 다 보이네... 


어쩌지... 일단 바쁘니까 별 도움 안 되는 수레를 끌어다 놓고 그 뒤에서 후다닥 바지를 갈아입으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40대가 되니 이런 상황에도 초연해지는구나...(이 단어를 이런 상황에 막 갖다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출입문 유리만 노려보며 내가 새 바지에 다리 한쪽을 겨우 집어넣었을 때 갑자기 반대편 문이 열린 것이다. 내 또래쯤 돼 보이는 한 남성이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왔는데 그는 내가 다리 한쪽을 헐벗고 있는 걸 못 봤는지 친절한 얼굴로 나에게 "봉쥬!"하고 인사까지 건네왔다. 


순간 얼음처럼 굳어있던 나는, 또 동방예의지국 출신인지라, "봉쥬"하고 인사를 받아준 후 바지를 마저 입기 시작했다. 이 남자,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기절초풍하면서 "미안해요 미안해요! 나 진짜 몰랐어요!"라고 외치면서 나왔던 문으로 다시 쏙 들어가 버렸다.

내가 바지를 마저 입는 동안에도 그 남자는 그 안에서 계속 미안하다고 어쩌고 저쩌고 외치고 있었고 내가 바지를 다 입은 후에는 오히려 그 문을 열고 그 남자를 달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괜찮아요. 이제 나와도 돼요." 

이 남자는 아직 내 눈치를 보면서 못 나오고 있는데 나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내부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혹시 거울 없으세요?"

남자는 거울이 없다며 세상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한술 더 떠서,

"이 바지 어때요? 거울이 없어서 모르겠네요."

이런 뻔뻔한 소리까지 했다. 

남자는 내가 입고 있는 바지를 노려보며 진심을 다해 감상평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물론 거의 못 알아들었지만 괜찮다는 소리 같았다. 미안하기도 하고 자기도 놀랬기도 하고 하여간 엄청 당황한 상태 같았다.

여전히 멀뚱멀뚱 서있는 남자에게 나는 다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의미로 "Je peux?" 라며 내 바지를 가리켰더니 이 남자는 "아! 네네!"라는 대답과 동시에 바람처럼 바깥으로 푱 사라졌다.


바지를 들고 건물을 나오는데 조금 전에 나에게 이 임시 탈의실을 안내해 주었던 옷가게 주인이 달려와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연신 사과를 했다.

"거기에 사람이 있는 줄은 진짜 몰랐어요. 분명 확인한다고 한 건데.." 

"괜찮아요. 이 바지 얼마예요?" 

너무 쿨한 대답이 나와서 당황했던지 선뜻 대답을 못하는 그녀. 나는 수업하러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기세였다. 

"음.. 얼마로 해 드릴까요?" 

"저는 모르겠어요."

"그럼... 5유로...?" 

자기가 말하고도 확신이 없는지 내 표정을 살피는 그녀. 아마 내가 공짜로 달라고 해도 줬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새것과 다름없는 바지를 5유로에 득템 하다니! 이미 탈의실에서의 기억 따위는 다 잊은 듯 득템 했다는 기쁨 하나로 나는 강의실을 향해 가볍게 날아갔다.  

그런데 방금 전에 만났던 그 남자가 저쪽에서 동료들이랑 서 있다가 나랑 눈이 마주쳤다. 둘 다 동시에 반갑게 눈인사를 교환했다. 누가 보면 정말 친한 줄 알겠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한테 얘기해 줬더니 친구들이 웃겨서 뒤집어진다. 

예쁜 바지 싸게 잘 샀으니 오늘은 그저 또 다른 좋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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