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맑음 흐림 그리고 다시 맑음

by 혜연

2024년 7월.

여름 세일기간이라 출근길 시내가 시끌벅적했다.

나도 덩달아 들뜬 기분으로 출근을 했다. 직장과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어서 출퇴근이 참 편리하다.
내가 일하는 작은 한식당은 시장 안에 있다. 오늘은 주말이라 시장 안에도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이 붐비고 있었다.
오늘 손님이 많겠는걸?

어묵볶음을 넣은 꼬마김밥을 10줄 정도 쌌는데 한 줄만 남기고 금세 다 팔려서 기분이 좋았다. 토요일에는 단골손님들이 많이 오는 날이라 우리는 반가운 인사를 반복하곤 한다. "봉쥬~!"

비빔밥을 항상 두 개씩 사가는 비빔밥 아저씨는 바캉스를 가게 되어서 당분간 못 오게 되었다고 미리 알려주셨다. 무뚝뚝한 표정이지만 어찌나 다정하신지. 이런 츤데레 단골 아저씨들이 몇 분 계시다. 샐러드만 종류별로 포장해 가시던 샐러드 할아버지네는 지난주부터 김밥을 하나씩 꼭 사가신다.

오후에는 빵집에서 일하던 총각이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며 인사를 하러 왔다가 디저트를 나눠주었다. 알고 보니 이 총각은 알제리에서 왔는데 드디어 원하던 엔지니어 일을 구하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나는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제때 축하를 해주지는 못했고 다만 먹음직스러운 에끌레어를 급하게 베어 물고는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었을 뿐이다.

img.pn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645147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eUfz3QdjmBtLP56NuVYPS8dg1vM%3D


기분 좋은 하루가 되려나 하고 있을 때 일이 생겼다.
우리 가게 바로 앞으로 시부모님이 지나가고 계셨던 것이다. 시어머니께서 "봉쥬"하고 인사를 하시기에 나는 당연히 나를 보러 오신 줄 알고 "잘 지내세요?(ça va?)"하고 인사를 드렸는데 시부모님은 아무 대답 없이 그냥 내 앞을 지나쳐 떠나버리셨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내가 저분들께 무슨 잘못을 했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더니 옆에 있던 동생이 대신 대답해 줬다. 언니는 잘못한 거 없어요.

마찬가지로 어이없어하던 SK는 말했다. 네가 혼자 너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속상하신가 봐.

아... 이렇게 정을 떼시는구나. 나랑 대화를 나눌 것이 아니라면 굳이 우리 가게 앞을 지나쳐가실 이유도 없으셨을 텐데. 이로서 우리의 가족관계는 끝이 난 건가 보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온종일 기분이 울적했다. 어릴 적 꿈속에서 우리 엄마가 나를 보고 넌 이제 내 딸이 아니라고 하셨을 때 베개가 흠뻑 젖도록 울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심정과 비슷했다.


남편이 이혼을 원한다고 울면서 처음 말씀 드렸을 때 시어머니는 차라리 잘된 거라며 나더러 새 출발을 하라고 하셨다. 아무래도 남편은 우울증 때문에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시며 이혼을 하더라도 나와 시부모님의 관계는 변함이 없을 거라고 하셨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도와주실 거라고 하시며.

내가 혼자 힘으로 독립해서 여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프랑스어도 잘 못하고 보증인도 없고 전기를 연결하고 집보험에 가입하고 하나하나 쉬운 일이 없었는데. 집은 잘 구했니. 집이 춥지는 않니.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 거니... 내가 자식이라고 하셨으면서 이런 것들은 한 번도 안 궁금하신가요...


퇴근을 하고 나서 마음을 식힐 겸 공원을 하염없이 걸었다.

울적한 기분이 들 때마다 (주로 무스카델이 보고 싶을 때) 나는 습관적으로 머리를 세차게 흔든 후 씩 웃어버리곤 한다. 그리고는 별일이 아닌 것처럼 머리를 의식적으로 비우도록 애쓴다. 그런데 오늘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SK말대로 본인의 아들은 여전히 어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나는 너무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속상하신 것일까. 나는 시장에서 시어머니의 향수가 은은하게 느껴질 때면 근처에 어머님이 오셨나 하고 두리번거리곤 하는데...

아... 생각하면 뭐 하나. 이제 우리는 정말 남이 되었나 보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분을 반전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니 글쎄, 젊은 남자가 뒤따라 오며 말을 걸어오는 게 아닌가?

"실례합니다."

그 남자는 내가 아름답다고 느꼈다며 인사를 건네고 싶었단다. 너 내가 몇 살인지 아니... 아니다. 말해주지 말아야지. 긴장된 표정으로 나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던 남자는 호감을 사고 싶었던지 한국에 대해 아는 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모카라떼라는 한국인 유튜브를 즐겨본다고 한다.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누다가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나는 대화 즐거웠다고 좋은 저녁 되라고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고 했는데 그 남자가 내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나중에 시간 되면 테라스에서 한 잔 하며 대화하는 거 어때요? 프랑스어 연습도 내가 도와줄게요."

평소 같으면 무시했을 텐데 에라 모르겠다 하고 번호를 줘버렸네. (금방 메시지 왔길래 무시했다;)

시부모님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는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이 나이에 젊은 남자한테 길에서 번호를 따이 다니 하하

나 이런 여자였다. 길에서 번호따이는 여자.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서 쓴다.

img.pn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645147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gWxs8z1%2Btsi0uGu64Cnv3eaM3GQ%3D





keyword
작가의 이전글눈치 없이 맛있었던 라테와 크루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