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고 있었다

이혼을 통보한 남편에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by 혜연

2024년 3월의 어느 토요일.
여전히 낭시의 날씨는 한겨울이었다.

퇴근 후 나는 룩셈부르크행 기차에 올랐다.
주말마다 버거씨가 나를 만나러 오곤 했는데 이번에는 버거씨가 룩셈부르크를 구경시켜 주겠다며 나더러 한 번 와달라고 했던 것이다.

기차에 오르는데 심정이 복잡해졌다. 남편과 정말 끝났다는 사실을 내가 완전히 받아들인 게 맞나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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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씨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다.
H-1


우리가 만나기까지 한 시간이 남았다는 소리다. 어제는 D-1이라고 메시지를 보내왔었는데. 아이처럼 카운트다운을 하며 얼굴 볼 때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기차 창밖으로 마법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머릿속의 혼란스러운 목소리들이 일제히 멎었다.

해 질 녘 하늘에 보랏빛으로 물든 채 낮게 내려앉은 구름더미들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늘에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던가보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나의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는데,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색깔의 세상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순간적으로 나에게 이혼을 통보한 남편에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노래 Do I have what it takes가 풍경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내 심장을 기분 좋게 콕콕 찔러왔다. 보랏빛 하늘을 치켜보며 이 노래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다.

룩셈부르크행 기차는 저녁노을뿐만 아니라 예쁜 마을과 호수등의 풍경들도 다채롭게 보여주었다. 여전히 꽁꽁 얼어붙은 듯 차가운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나는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유난히 끔찍했던 이 겨울이 드디어 끝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봄이 내 인생에 찾아오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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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씨덕에 난생처음 가 본 룩셈부르크.
이렇게 바로 근처에 있는데 왜 그동안 한 번도 가 볼 생각을 안 했을까. 소파에서 누워만 지내던 남편 때문에 나까지 바깥세상과 너무 단절된 채로 살아왔던 것 같다. (우습지만 나는 그 작은 세상에서도 행복했었다.)





룩셈부르크는 대중교통이 모두 공짜였다!
우리는 외곽에 차를 세워놓고 트램을 타고 서너 정거장을 이동해서 시내로 갔다.
먼저 올드 타운을 구경시켜 줬는데 현대식 건물이 가득한 곳에 수백 년 된 타운이 조화롭게 보존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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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흐렸지만 우리는 오래 걸으며 많은 대화를 나누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버거씨는 훌륭한 가이드였다.
내가 3년간 근무했던 싱가포르와 자꾸만 비교를 하게 되었는데 버거씨는 매우 흥미롭게 들어주었고 우리는 곧 룩셈부르크와 싱가포르 사이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함께 토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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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두칼 궁전. 그러니까 이곳은 룩셈부르크 최고 통치자인 대공작이 거주하는 곳이다.
이 궁전 바로 맞은편에 초콜릿 디저트가게에서 우리는 핫초코와 치즈케이크를 먹으며 몸을 녹였다. 인상적인 것은 가게 직원들이, 내가 영어로 말하면 영어로 대답해 주고 프랑스어로 말을 하면 프랑스어로 대답을 해 주었다는 점이다. 이 가게에서 우리는 꽤 오래 앉아 별별 농담을 주고받으며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웃기는 버거씨가 웃긴데 버거씨는 내가 너무 웃기다며 앞으로도 제발 이 모습 변치 말아 달라고 말했다.

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671931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2BXzMc4UW%2FeIO6z%2FczAinUuOTbUo%3D 룩셈부르크 시내에서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희한한 경험이었다.


버거씨는 본인이 근무하는 직장 근처를 구경시켜 줬다. 본인이 일하는 곳, 점심때 자주 가는 레스토랑, 동료들과 일주일에 두 번가는 근처 헬스장 등등 본인의 일상을 신나게 소개해 주었다.

안 그래도 날씨가 쌀쌀했는데 갑자기 차가운 비가 쏟아졌다. 우리는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손을 잡고 열심히 달리며 깔깔 웃었다. 둘 다 제법 다리가 길어서 다른 행인들보다 두 배는 빠르게 달린 것 같다.

빗속을 헤치며 버거씨가 나를 데려간 곳은 소피텔 라운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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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우리는 칵테일을 마시며 해 질 녘의 아름다운 올드타운의 풍경을 감상했다. 야경은 역시 해 질 녘이 최고다. 노을빛을 배경으로 도시에 조명이 하나 둘 켜지는 모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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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씨는 아직 룩셈부르크 투어가 끝난 게 아니라고 했다. 강변에 있는 레스토랑에 저녁식사를 예약했기 때문에 서둘러 가야 한다고-

날 위해 이 남자는 정말 알차게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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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파라거와 와인소스를 얹은 송아지 스테이크- 엄청나게 부드러워서 둘 다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강변의 풍경이 분명 아름다운 곳이었을 텐데 밖이 너무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식사 후 강변을 걸으며 (강바람은 좀 추웠지만) 소화도 시키고 여전히 수다를 이어갔다. 버거씨의 소개팅 굴욕 에피소드를 들으며 너무 웃겨서 강변이 떠나가라 웃기도 했다. 버거씨는 민망해하다가 내가 웃으니 자기도 좋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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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든 무얼 먹든 나는 진심으로 즐거웠는데 버거씨는 그런 내 모습을 보니 기분이 정말 좋다고 했다.
앞으로 보여줄 것들이 엄청 많다며 기대해도 좋다고 했다.

정말이지 기대된다.

앞으로 펼쳐질 내 새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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