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2025년 2월
참새가 방앗간에 들르듯 오늘도 퇴근길에 리들에 들렀다.
주말에 낭시로 오는 버거씨를 위해 뭘 좀 사다 놓을까... 견과류랑 다크초콜릿을 둘러보며 가격을 비교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반갑게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혜연! 혜연, 너 맞지? 아 맞네! 맞다니까~ 내가 제대로 본 게 맞았어!!"
내 이름을 이렇게 정확하게 불러줄 프랑스인이 많지 않은데 누구지...? 나를 엄청 반가워하는데...
낯이 익긴 하는데 누군지 바로 떠오르지 않아서 멍하게 서 있다가 3초 만에 떠올렸다.
"마리!"
파리에 사는 전남편의 사촌 누나였다.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더 반가워하며 내 양볼에다 비쥬를 하며 쉴 새 없이 안부를 물어오는 그녀.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일 한다며? 힘들지 않고?"
전남편과 남남이 된 사실을 분명 알 텐데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나를 대하는 그녀. 살짝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고 나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반갑다고 생각하니 또 반갑네.
"잘 지내요. 근데 낭시에 방문 중인 거예요?"
"나야 삼촌이랑 숙모를 보러 왔지!"
그녀의 고갯짓을 따라 저절로 내 시선이 돌아갔는데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어정쩡한 거리에서 시어머니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서 있는 모습이 그제야 보였다. 얼굴을 심하게 붉힌 채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빚쟁이를 마주친 표정 같달까. 저런 표정 짓는 건 또 처음 봤네.
죄책감인가.
이제 와서... 이런다고?
일 년 넘도록 내 앞에서 그렇게 당당했으면서?
"아, 거기 계셨어요? 잘 지내시죠?"
내가 아무렇지 않은 듯 큰소리로 인사를 먼저 건넸더니 세상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무렇게나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때 나는 시어머니가 주신 고양이그림 장바구니를 메고 있었다. 아기 오리처럼 시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내 모습이 엊그제 같네.
시어머니는 조카인 마리에게 어서 이만 가자고 재촉했지만 마리는 그럴 생각이 없는지 한참 동안이나 내 안부를 더 묻고 아쉬워하다가 떠났다.
부부가 헤어지면 멀쩡하게 잘 지내던 나머지 가족들과의 관계도 이렇게 어색해지는 거구나. 슬픈 일이다. 일전에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올 때 해맑은 얼굴로 나한테 인사를 하러 시장에 찾아왔던 시동생도 떠오른다.
그나저나 시어머니는 왜 이제 와서 내 눈을 똑바로 못 쳐다보는 걸까.
버거씨는 이렇게 해석했다.
한겨울 갑자기 세상 외톨이가 된 외국인 며느리가 집을 구하는데 보증도 안서준거. 본인과 아들의 돈을 지키는 게 급선무여서 먼 타국에서 혼자가 된 며느리의 근황조차 물어본 적도 없었다는 사실을 조카 앞에서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진 게 아닐까.
프랑스어도 잘 못하고 물정을 잘 모르던 며느리가 당시에는 만만하게 보였을 것 같다. 그러니 별별 부당한 서류에 사인을 요구했겠지.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다르게 나는 지금 낭시에 너무나 잘 정착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애석하지만 낭시는 좁은 사회다. 그들의 치부를 알고 있는 내가 불편하기도 하겠다. 생각해 보니 시어머니는 나 때문에 그 좋아하는 시장 발길도 끊으셨네.
내 눈을 피하는 시어머니께 다들 잘 지내는지 안부를 먼저 여쭈었다. 당황하며 우물쭈물 대답하는 그녀에게 나는 여유 있게 웃어주며 그럼 다행이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잘 처신한 것 같은데 마음 한편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