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일요일 오후에 버거씨는 내 서류를 함께 준비하자고 했다.
이혼은 시간이 걸리니까 일단 그전에 별거를 공식화해야 한다던 변호사의 조언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경시청에다 보내는 편지도 써주었고 (AI를 능숙하게 사용해서 편지까지 작성하는 버거씨를 보고 꽤 감탄했다. 또 한편으로는 요즘세상에도 이렇게 우편으로 편지나 서류를 전달해야 하는 프랑스 상황이... 하아... ) 관련 신고서 양식을 찾아서 빈칸을 채우고 프린트를 했다. 필요한 서류들도 모두 인쇄했더니 경시청에다 보내야 하는 서류가 총 10장이나 되네.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길게 걸렸다.
전남편 서명 없이 일단 내 서명으로만 진행해 보고 한번 추이를 보기로 했다.
저녁 기차를 타고 낭시로 돌아가야 하는데 남은 시간이 별로 없네. 따뜻하던 해가 서쪽 하늘로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아쉬우니까 우리 잠깐이라도 나가서 신선한 공기를 좀 쐬자.
그래도 눈에 띄게 낮이 길어지고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나는 여러모로 겨울을 싫어하는구나. 봄이 오니까 정말 되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쉴 새 없이 고백하는 버거씨는 이번에도 어김이 없었다. 석양을 보니 뭔가 스위트한 말을 해야겠다 싶었나 보다.
"나는... 너를 만나고 나서 더 나은 사람이 되었어. 너는 나의 스승이고 롤모델이야."
"응? 내가 뭘 가르쳐줬지?"
쑥스러운 듯 쭈삣거리면서도 꽤 길게 말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건 대충 이랬다.
"나에게 너는 일종의 부다라고나 할까... 나는 너를 존경하고 많이 배우고 있어.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 일상의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 회의 중 언쟁에서 이제는 내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하려고 기운을 빼지 않아. 좋은 사람들과 웃으며 보내는 짧은 시간들이 더 소중해졌어. 네 덕분에 나는 마음의 평화를 찾은 것 같아."
그 어떤 말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나는 우뚝 멈춰 서서는 까치발을 들고 버거씨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구나..."
"며칠 전 회사에서 보스랑 일대일 면담이 있었어. 지난해 내 성과에 대해 최고의 평가를 받았어. 무엇보다 내가 팀원들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 팀원들에게 충분히 들었다고 하더라. 승진이 마땅한데 지금 회사 재정상 난관이 좀 있을 수는 있다네. 그래도 본인이 최선을 다해서 인사과에 말해보겠다고 하더라. 내가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내가 직접 말할 필요가 없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다면서 말이야. 정말로 기분이 좋았어. 너를 만나고 나서 나는 제대로 된 마음의 평화를 얻었어. 주변 사람들도 그게 느껴지나 봐."
눈물 날 뻔했다. 이리도 나를 높게 평가해 주다니...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칭찬이었고 감동이었다.
버거씨는 평소에도 회사 업무에 대해서 나에게 시시콜콜 이야기해 준다. 동료와 크고 작은 갈등이 있거나 혹은 상사의 결정에 이견을 제시할 필요가 있을 때 나에게 적극적으로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나는 최대한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하지만 할 말은 다 할 수 있게, 그러니까 융통성 있게(?), 때론 웃으며 직구로, 이런 식으로 해봐라라고 (내 기준으로) 대답을 해준다. 어디나 다국적 회사 분위기는 비슷하니까... 버거씨는 내 조언을 고마워하고 때론 무릎을 치며 감탄하기도 한다.
"아, 얼굴 붉힐 필요가 없었구나! 다음번에 또 그러면 네가 말해준 대로 해야겠다!"
이러니 내가 조언해 줄 맛이 안 나겠냐고...
본인의 회사일에 내가 함께 고민하게 해 줘서 나야말로 더 고맙다.
동네로 다시 돌아왔더니 석양을 배경으로 공을 차는 동네 꼬맹이들이 골목에 나와 있었다. 이 풍경 또한 정겹구나.
기차 타기 전에 버거씨가 간단하게 저녁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풉... 비비고 만두라니ㅋ
이 집에 한국 제품이 점점 늘고 있다.
버거씨는 내 덕분에 다음 한주를 시작할 에너지를 충분히 충전했다고 말했다.
나야말로!
우리는 환상의 팀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