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며칠 전 미역을 사 오신 엄마가 말씀하셨다.
"이걸로 금요일 미역국 끓여줘야지."
"누구 생일이야??"
해맑은 내 질문에 엄마가 건조하게 대답하셨다.
"니 생일."
오잉?? 내 생일은 아직 안 됐는데??
달력으로 달려가는 나를 보며 엄마가 음력생일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오!! 진짜네!! 완벽하다~ 음력은 한국에서 보내고 양력은 프랑스에서 또 한 번 축하받고~~ 오예~~!!
생각지도 못한 서프라이즈에 기분이 좋았다. 일부러 날짜를 이렇게 잡으려고 했어도 어려웠을 것 같은데 제대로 얻어걸렸다.
생일 당일날 아침 엄마는 미역국을 한 솥 끓이셨다. 소고기도 넣고 들깨도 넣었는데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엄마표 미역국은 정말 맛있구나.
이 날엔 우리 오빠도 왔다. 오송에 사는 오빠는 한우를 사 와서 직접 불고기를 볶았다.
"동생 생일인 건 또 어떻게 알고 소고기까지 사 왔대?"
오빠를 향한 엄마의 능청스러운 질문.
내 음력생일은 나도 몰랐는데 오빠가 알고 왔을 리가. 하지만 우리는 모두 오빠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뭐라고 대답할지 지켜보였다. 역시 갈 길을 잃은 눈동자. 어.. 어쩌다 보니 시간이 맞았단다. 괜찮아, 나도 몰랐어 내 생일.
한여름 녹음처럼 푸르디 푸르른 정겨운 내 생일상이다.
땅두릅+산두릅(오빠가 산에서 직접 채취해 왔다) 그리고 쌉쌀한 가시오가피나물, 열무김치, 고추장아찌, 상추에 미역국...
어릴 적엔 풀만 먹는 우리 집 밥상이 불만스러웠는데 크고 나니 이게 최고라는 걸 알겠더라. (오늘은 생일이라서 불고기도 있으니 진수성찬 맞다.)
저 스뎅 밥그릇은 프랑스 갈 때 몇 개 가져갈까 싶다. 튼튼하고 가볍고 실용적이다.
오늘도 아빠가 밥을 지으셨는데 오늘은 특별히 밤도 올려주셨다. 작년 가을에 직접 산에서 주워오신 건데 아껴두신 듯하다.
식사가 끝난 후 언니가 주문 제작한 케이크를 꺼내왔다.
저 생일선물로 샤넬 받았어요 여러분!!!!!!
네. 와동공주 바로 접니다.
조카 나영이가 6살 때였던가 울 언니가 "우리 공주~"라고 나영이를 부르는 걸 본 내가 나영이한테 장난으로 (하지만 진지하게) 말했었다.
"이 집에서 너는 공주가 아니야."
6살 나영이가 깜짝 놀라서 쳐다보길래 내가 "할머니한테 물어볼래?" "할머니, 이 집에서 공주는 나지? 나영이 아니지?" 했더니 우리 엄마는 또 진지한 표정으로 6살 나영이 한테 "응, 이 집에서는 이모가 공주야. 나영이는 고잔동에서만 공주지. 와동에서는 이모가 공주 맞아." 하시며 다 큰 내 머리를 소중하게 쓰다듬어주셨다. 그 모습을 본 우리 언니가 "둘이 자~알 한다, 애 앞에서" 하면서 혀를 찼음.
봤지, 나영아? 와동 공주는 이모라니까! 너네 엄마도 이제 인정했네ㅋ
케이크 너무 이쁘다 언니야~
다음에 돈 많이 벌어서 진짜 백도 사줘라~
불 끄고 온 식구들 다 같이 생축송을 불렀다. 내 생일인데 내가 젤 크게 불렀다. 사랑하는 와동 공주의~~
근데 갑자기 할머니께서... 돌발 행동을 하셨다!
만 원짜리를 한 장 꺼내시더니 예쁜 샤넬 케이크 위에다 지폐를 척! 하고 붙이시는 게 아닌가!?
2초간의 정적 후에 온 식구가 웃느라 뒤집어졌다.
할머니 이거 돼지머리 아니야...
지폐도 케이크도 조금씩 오염됐지만 엄마가 오염된 부분은 본인이 드시겠다고 쿨하게 말씀하셨다.
검은 크림이 묻은 지폐는 내가 닦아서 잘 챙겼음ㅋ
할머니는 조금 전 식사 도중에도 갑자기 우셔서 우리를 당황시키셨다.
우리 삼 남매랑 조카들까지 오랜만에 한자리 모인 모습을 보니 그냥 눈물이 난다고 하셨다.
음? 그러고 보니 그러네. 어느덧 함께 나이 들어가는 우리 삼 남매가 모였고 이제는 다 자라서 능글맞아진 조카들 얼굴을 보니 나도 좀 뭉클하긴 했다.
엄마, 아빠, 그리고 할머니는 그만큼 연세가 더 드셨다.
세 분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아무튼 오늘도 할머니 덕분에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또 하나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