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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용 Oct 26. 2020

프랑스에서 첫 심부름

나는 힘이 세고 착하다. 

프랑스에 온 지 두 달이 될 때까지 나는 한 번도 혼자서 외출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중 대부분은 봉쇄 기간이었기도 하지만 봉쇄가 해제된 이후에도 나는 코로나와 막연한 인종차별에 대한 공포로 인해 외출 자체를 꺼려왔던 것이다. 


밤새 내리던 비가 오전까지도 추적 거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내려왔더니 시어머니께서 본인의 샤워가 끝나면 같이 계란을 사러 슈퍼에 가자고 하셨다. 


“제가 혼자 슈퍼에 걸어가서 사 올까요?”


“정말 그래 주겠니?”


“네 그럼요. 혼자서 슈퍼도 갈 줄 알아야죠.”


“그래그래. 그럼 계란 80개만 사다 주렴.” 

80개...?!


머릿속이 혼란해지려던 바로 그때 시어머니께서 또 말씀하셨다. 


“아, 그리고 감자도 필요해. 퓌레나 튀김용으로 사면돼. 종류 잘 보고 사거라.”

어느새 내 손에 지폐 20유로를 쥐어주셨다. 내 돈으로 사겠다고 잠시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시어머니의 돈을 받아 집을 나서게 되었을 땐 이미 계란 80개와 감자의 무게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커다란 장바구니 하나를 들고 쭐레쭐레 혼자서 골목을 걸어가는데 비가 막 그쳐서 공기가 아주 상쾌했다. 6살 어린이가 혼자서 생애 첫 심부름을 다녀오는 옛날 예능 프로가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났다.

프렌치프라이용이라고 써진 감자를 골랐다. 감자 종류가 너무 많아서 용도를 잘 보고 사야 한다. 감자와 계란 3판(!)을 사고 거기다 또 샴푸랑 치약까지 샀다. 계산대 직원에게 인사도 건네고, 계산도 무사히 잘하고, 잔돈도 잘 받았다. 별것도 아닌데 왜 그리 뿌듯하던지. 


엄청난 무게의 장바구니를 낑낑거리며 한쪽 어깨에 끌 어머니 고서 집으로 룰루랄라 돌아왔다. 어깨는 무겁지만 발거음은 가볍게. 


집에 돌아왔을 때 시어머니께서는 위층에 계셨고 나는 혼자서 부엌에 감자와 계란을 정리해 두었다. 

잠시 후 내려오신 시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왔다. 

“세상에! 울랄라... 저 계란들을 대체 어떻게 들고 온 거니? 길에 나가서 팔려고 저렇게나 많이 사온 거지?” 

“네? 80개 사 오라고 하신 거 아니었나요?”

시어머니는 숨이 넘어가게 웃고 또 웃으셨다. 

“아닌데... 뭐 큰 문제는 아니야. 저거 다 먹을 수 있어.”


내 부족한 프랑스어 실력을 원망했다. 프랑스어로 80은 20X4라고 말한다. 시어머니께서는 10개들이 계란 4통을 사 오라고 하신 거였는데 내가 4라는 숫자 때문에 잘못 알아들었나 보다.


오후에 퇴근해서 온 자서방은 내가 혼자서 마트에 다녀온걸 대견해하면서도 부족했던 의사소통에 대해 시어머니께 잔소리를 했다. 시어머니께서는 그래도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계란 다 먹을 수 있으니 걱정 마라. 너 공부하고 있을 때 나 혼자 슈퍼에 다시 가서 햄을 가득 사 왔단다. 너희 좋아하는 키쉬 만들 거야." 

저녁에 시어머니께서는 표고버섯 키쉬를 만들어 주셨다. 

표고버섯과 대파를 듬뿍 썰어 프라이팬에 먼저 볶으셔서 풍미가 더 진했다. 

키쉬 한판을 만드는데 계란이 8개가 들어간다. 그럼 내가 90개를 샀으니까... 82개가 남았군. 


처음 먹어본 표고버섯 키쉬는 내가 먹어본 키쉬 중 최고였다. 쌍 따봉을 치켜들고 “맛있다.” 연발하다가 문득 말했다. 


"그런데요... 우리 앞으로 계속 키쉬만 먹게 되는 건가요...?" 


그 말에 모두들 웃었지만 아무도 대답은 해 주지 않았다.  




저녁 식사 후에 부엌 정리를 하시다가 뒤늦게 감자를 발견하신 시어머니께서 한차례 비명을 또 지르셨다. 


"오 세상에... 너 감자까지 사 온 거니? 저걸 혼자 다 들고 왔어? 어깨에다가...?" 


"네 어깨로요. 무겁긴 했는데 제가 힘이 세서 괜찮았어요."


시어머니께서는 내가 착하다고 하셨다. 힘이 세면 착한 건가요...


첫 심부름을 비록 깔끔하게 성공했다고 말하진 못하겠지만 이 정도면 만족한다. 다 같이 웃고 배불리 먹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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