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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살을 막으려 할까요?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사랑의 발명>, 이영광

"선생님, 제가 왜 죽으면 안 되나요?" 진료실에서 이 질문은 언제나 가슴을 철렁하게 합니다. 그건 지금 제 앞에 있는 누군가가 치명적인 존재론적 고민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참 막막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죽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이유를 대기가 어려운 말입니다. 심지어 카뮈 는 삶을 역설하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 다." 위대한 철학자조차 고심하게 만든 질문 앞에서 저희는 너무나 초라해집니다. 그저 어떤 대답이 당신께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수 있을지를 필사적으로 고민할 뿐입니다. 신이 주신 목숨을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된다고 근엄하게 꾸짖을 수 있던 몇 백년 전 사제들이 부럽기까지 합니다. 파편화된 세상에서 자살 역시 개인의 선택일 뿐이라는 주장에 맞서는 것은, 역시 한낱 개인일 뿐인 의사들에게도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만약 자살이 선택이라고 한다면 의사들에게 그것을 감히 막으려 할 자격이 있을까요? 우리 사회는 자살을 막기 위해 관련 보도의 내용을 규제하거나 자살 위험성이 높은 개인을 그의 뜻에 반해 입원시키는 등 다양한 일을 합니다. 이런 조치들은 어느 정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화하기 위해서 적절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의사조력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에 대한 논의는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듭니다. 의사조력자살은 회복의 여지가 없는 말기 환자들이 치사량의 약물 투여 등 의료진의 도움을 통해 자살하는 것으로, 해외 몇몇 국가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습니다[1] . 의사들은 자살을 막아야 한다고 배웠는데, 이런 경우에는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자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윤리학자들은 먼저 생명 존중의 의무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정당한 이유가 없다면 생명을 가진 것들이 해를 입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누군가를 실제로 해치면 안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도와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려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신고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들에게는 이런 의무가 좀 더 강하게 적용됩니다. 심지어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비밀 보장의 의무조차 잠시 예외가 될 수 있습니다. 미국 정신의학회를 포함한 다양한 단체의 윤리 규정에서는 자살 위험성이 매우 높은 경우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적절한 보호자에게 경고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원칙도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정당방위와 같이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타인의 생명을 뺏는 것이 윤리적으로 허용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자살 역시 어떤 경우에는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 단순히 생을 연장하는 것일 뿐이고, 그의 삶을 존중하는 것은 아닌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치료나 소생술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생겨났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의사조력자살은 여기서 더 나아간 것입니다. 누군가가 스스로 살아있는 것이 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판단했다면, 삶을 끊겠다는 결정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것이 자율적인 판단이냐는 의문이 뒤따릅니다. 자살을 개인의 선택으로서 존중하려면 그 선택이 온전한 판단력을 갖춘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살이 평소의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일지에 대한 의문이 남습니다. 만취한 상태에서 하는 결정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과 비 슷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자살시도가 정신질환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누군가가 자살을 결정할 때 그것이 정말로 자율적인 결정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됩니다.


자살 사망자들의 삶을 체계적으로 분석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유를 밝혀내는 작업을 심리부검이라고 합니다. 심리부검에서는 사망자의 행적 추적, 주변인 면담, 의무기록 및 수사기록 검토 등 다각도의 분석을 통해 죽음에 의도성이 있는지, 어떤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는지를 추정하게 됩니다[2] . 1950년대 미국의 특정 지역에서 한 해 동안 발생한 모든 자살 사망자를 대상으로 최초의 심리 부검 연구가 수행되었습니다[3] . 이 연구에서 134명의 자살자 중 약 90%가 자살 시점에 우울증이나 알콜사용장애와 같은 정신질환을 겪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유사한 다른 연구들에서도 이 비율은 공통적으로 매우 높게 나타납니다[4,5].


이처럼 대부분의 자살은 정신질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질환은 생각이나 감정, 행동에 직접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이런 왜곡은 특히 조현병이나 양극성 장애와 같은 중증 정신질환에서 극단적입니다. 급성기 환자들은 갑자기 대통령이 되겠다며 선거에 출마하거나 사악한 비밀 조직의 미행을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우울증과 같이 좀 더 흔한 질환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울증의 핵심 요소는 부정적인 인지적 왜곡으로, 자신이나 주변 환경, 미래에 대해 별다른 근거 없이 실제보다 더 나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우울의 늪에서 사람들은 종종 스스로의 고통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느끼는데 치료를 통해 증상이 나아지면 사실은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는 것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이는 우울증으로 인한 생각의 왜곡이 바로잡히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은 환자 스스로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 살을 결심한 사람들이 먼저 정신질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온전한 상태에서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겠다는 마음의 반대편에는 종종 다른 것이 존재합니다.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의 마음을 잘 들어보면 종종 죽음 그 자체를 쫓는다기보다는 지금의 고통을 끝내고 싶어서, 가까운 누군가가 나의 고통을 알아주었으면 해서, 현실적인 문제가 막막하게 느껴져서 등의 숨은 이유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것이 그저 '자살하는 척', '쇼'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의식하는 것만이 마음의 전부가 아니고, 때로는 주의를 기울여 정말로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마음이 너무 지쳐 있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누군가의 죽겠다는 마음을 바로 수긍하기에 앞서 도움을 청하는 다른 목소리가 있는지를 주의 깊게 들어보려고 합니다.


물론 독심술사가 아닌 이상 죽음을 바라는 누군가에게 정신 질환이나 다른 의도가 있는지를 100% 확실하게 알 방도는 없습니다. 그래서 딜레마가 생깁니다. 자살하려는 누군가가 완전히 이성적이고 자율적인 결정을 한 것이라면, 막으려 드는 것은 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니라면? 죽음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가 회복되어 죽음을 대신할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영원히 사라져 버립니다. 어느 쪽도 확신을 가지고 택할 수 없기에 그저 어떤 입장을 취할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이때 자살의 결과가 너무나 최종적이라는 점, 자살 시도자에서 정신질환의 높은 유병률, 망자의 주변인들이 받을 추가적인 고통 등을 고려하면, 자살시도에 대해 일시적이고 단기적인 개입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결론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희는 죽음을 원하는 누군가의 자유를 잠시 침해하게 됩니다. 그가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 이 아니라, 다시 한번 숙고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추구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것입니다. 치료라는 과정에서 환자가 원하는 것과 환자에게 좋은 것은 때로 상충합니다. 저희는 자살이라는 중대한 상황에 대해서는 의사들이 환자에게 최선이라고 믿는 바를 좀 더 강하게 권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제한적으로 모든 자살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신질환 등의 이유로 판단력이 손상되지 않은 개인에게 개입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다른 목적 없이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서만 무한정 입원시키는 것은 부당합니다. 한국의 정신건강복지법에서도 자살의 위험만으로는 누군가를 본인의 의사에 반해 입원시킬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정신질환이 있거나 최소한 정신질환자로 추정되는 근거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자율적인 개인이 지속적으로 죽음을 원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회복가능성이 없는 말기 환자들과 같이 한정된 대상에서는 의사조력자살과 같은 제도가 의미 있을 수 있지만, 아직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정리하면 저희 의사들은 누군가가 자살이라는 결론에 이를 때, 그의 자율성과 의도가 진정으로 반영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일단은 자살 시도를 멈추도록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봅니다. 특히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에게 질문하는 누군가가 죽음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지금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의사들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저희는 정신의학의 전문가로서 정신질환으로 인한 고통이 때로는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적절한 도움이 있다면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추가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마음을 동정이나 연민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시인의 말처럼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수많은 진료실에서 반복해 결심합니다. 당신이 산비탈로 떠나지 않도록 곁에 있겠다고, 필요할 때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하고 또 재발명해 낼 것이라고.


당신의숲정신건강의학과 박성현 부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위 글은 헬스조선의 연재 <당신의 오늘이 안녕하길>의 [우리는 왜 자살을 막으려 할까요?]를 통해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1. Kim Y. Ethical Issues with Physician-assisted Suicide in South Korea. Korean J Med Ethics [Internet]. 2022 Dec [cited 2024 Aug 23];25(4):367–85.

2. Na KS, Paik JW, Yun MK, Kim HS. Psychological Autopsy: Review and Considerations for Future Directions in Korea. J Korean Neuropsychiatr Assoc [Internet]. 2015 [cited 2024 Aug 15];54(1):40.

3. Robins E, Gassner S, Kayes J, Wilkinson RH, Murphy GE. THE COMMUNICATION OF SUICIDAL INTENT: A STUDY OF 134 CONSECUTIVE CASES OF SUCCESSFUL (COMPLETED) SUICIDE. AJP [Internet]. 1959 Feb [cited 2024 Aug 15];115(8):724–33.

4. Arsenault-Lapierre G, Kim C, Turecki G. Psychiatric diagnoses in 3275 suicides: a meta-analysis. BMC Psychiatry [Internet]. 2004 Dec [cited 2024 Aug 24];4(1):37.

5. Cavanagh JTO, Carson AJ, Sharpe M, Lawrie SM. Psychological autopsy studies of suicide: a systematic review. Psychol Med [Internet]. 2003 Apr [cited 2024 Aug 24];33(3):395–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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