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각자의 근황 토크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던 중 테이블에 올려둔 누군가의 스마트폰이 지잉 울립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자기 스마트폰을 꺼내 SNS를 확인하고 메신저에 답을 하다 보면 정적 속에서 시간이 흐릅니다. 누군가가 먼저 스마트폰을 내려놓을 때까지 정적이 계속됩니다.
종일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한 가족. 정성껏 차린 식탁 앞에 앉습니다. 마주 보고 앉아 잠깐 이야기를 하다가, 그중 한 명이 스마트폰 알람을 듣고 화면을 쳐다봅니다. 다른 가족은 둘 곳 없는 시선으로 방황하다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찾아와서 포털 기사를 클릭합니다. 눈은 스마트폰에, 입은 뭘 먹는지도 모르며 시간이 흘러갑니다.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부모. 아이와 신나게 놀다가, 아까 온 문자에 답장하지 않은 것이 떠올랐습니다. ‘엄마 잠깐 문자 답장 좀 하고 올게’라고 말하고 화면을 확인합니다. 문자에 답장하고, 알람을 확인하고, 내친김에 다른 사람들 프로필 업데이트까지 싹 훑어봅니다. 2-3분이면 될 일이었는데 벌써 10분이 지났습니다. 아이가 옆에 와서 묻습니다. ‘엄마, 아직도 답장 쓰고 있어?’ ‘어, 지금 다 했어. 금방 갈게.’ 하지만 엄마는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제 이야기입니다.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부모를 조르고 졸라 핸드폰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핸드폰은 전화와 문자만 가능한,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고철이지만, 그것만 있으면 언제든 친구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10대는 그런 것이지요. 또래에게 인정받고, 또래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또래에게 ‘멋져 보이기 위해’ 무엇이든 해내는 시기. 그러나 핸드폰은 우리를 아주 가깝게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친구와 떨어져 있는 시간에는 수시로 문자를 주고받으며 시시콜콜한 일상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함께 있는 시간, 친구의 핸드폰이 울리고 친구가 그에 응답하는 동안 나는 외로웠습니다 다. ‘저 친구는 나 말고도 계속 연락 오는 친구가 있구나.’ ‘나하고 수다 떠는 것보다 다른 친구의 연락을 받는 게 중요한가?’ 질투 나고 부럽고 무시당하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불쾌한 느낌이 싫어서 나도 얼른 내 핸드폰을 보았습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다른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공허감만 돌아왔습니다. 제가 핸드폰을 보고 있을 때, 그 친구도 외롭지 않았을까요.
스마트폰은 사람 간의 거리를 가깝게 만들어주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실제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의 다양한 기능을 통해 우리는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친구를 다시 만나고, 멀리 떨어져사는 친구들의 근황을 알 수 있으며,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연결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여기, 내 눈앞에’ 있는 사람과의 연결고리는 약해지지요. <불안 세대 (조너선 하이트 저)>에 의하면, 스마트폰은 우리의 주의를 너무나도 강력하게 사로잡아, 호주머니 속에서 0.1초만 진동을 해도 많은 사람은 혹시 중요한 정보라도 있을까 봐 대면 대화를 중단한다고 합니다. 사소한 일이라 생각해서 따로 말하지 않고 잠시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보게 되는데, 이때 상대방은 무의식 중에 ‘나는 최신 알림보다 덜 중요한 존재구나’라는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무시를 당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며, 너무 불쾌하고 아파서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일이지요. 이런 일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을 너무 깊게 파고들었습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쉽고 빠르고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시대임에도,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외로워졌습니다. 외로움은 겉으로 보이는 ‘홀로 있음’이 아닙니다. 눈앞의 사람에게 스마트폰 보다 못한 존재로 무시당하고, 나의 가치는 ‘좋아요’의 숫자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외로움은 단지 친밀하게 지내야 하는 사람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스스러와도 단절된 느낌입니다. 스마트폰은 우리가 어떻게 다뤄야 할지 미리 생각해 보기도 전에 우리의 삶에 깊게 파고들었고, 우리의 마음 건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길고 깊은 외로움, 끝없는 비교와 자신에 대한 가혹한 평가, 과거의 사소한 실수가 영영 지워지지 않는 혹독한 온라인 세계는 우리가 자신만의 고치에 깊게 파묻히게 만들고 아주 사소한 위협과 작은 자극에도 과잉반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우울과 불안, 무기력, 자살과 자해가 만연한 시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어려운 마음들은 여전히 몰이해 속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요즘 다 힘들게 살지 너만 힘드니’ ‘이번엔 또 뭘 들어달라고 자해한 거니’ ‘네가 부족한 게 뭐라고 우울증이니’ ‘너처럼 친구가 많은 아이가 외롭다고? 이해가 안 되네.’
외로워서,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어서, 가장 빠르고 손쉬운 방법인 스마트폰을 찾습니다. SNS를 확인하고, 메신저의 프로필을 확인하고, 단체 채팅방을 읽어보고, 포털 뉴스를 읽어봅니다. 잠깐의 외로움은 달래질지언정 화면이 꺼지고 나면 억지로 막아둔 둑이 터지듯 외로움이 밀려옵니다. 물론 외로움이 스마트폰 때문만은 아닙니다. 경제적 안정을 달성하기 어려워진 시대, 다양한 종류의 차별, 도시화된 생활, 산업 구조의 변화로 일자리가 위태로워진 것, 그리고 모든 것을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치부하는 노력만능주의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365일 24시간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스마트폰, 그리고 시간을 가리지 않고 울리는 ‘좋아요’와 수많은 알람에 감시당하는 생활은 모든 것이 한꺼번에 폭발하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외롭게 하는 온라인 관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비언어적 소통을 배제하고 텍스트만으로, 한꺼번에 여럿과, 동일한 시간대를 공유하지 않으면서도 소통할 수 있는 온라인의 관계는 빠르고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한편 현실 세계의 관계를 만드는 일은 성가시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입니다. 서로의 표정을 읽고 분위기를 알아차리는 사회적 감각이 함께 발달해야 하지요. 마음의 에너지를 투자해야 하고, 불안정한 상태를 견뎌내며, 쓰린 좌절을 맛봐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 관계는 투자한 만큼 견고하고 쉽게 깨지지 않습니다. 반면, 온라인 관계는 앙상하고, 부서지기 쉬우며, 확 타올랐다가 꺼져버리는 불꽃놀이에 가깝습니다. 온라인 관계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에, 온라인에서 외로움을 벗어나보려는 우리의 시도는 거의 항상 실패하고, 더 많은 외로움을 그러안게 만들지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면 좋을까요?
지금, 스마트폰을 확인했다며 모두 가방에 스마트폰을 넣어볼까요?
지금, 가족이 모인 식탁에서 스마트폰을 치워볼까요?
지금, 스마트폰을 서랍장에 올려두고 다시 아이에게 달려가볼까요?
(지금 울리는 그 알람, 당장 확인하지 않아도 지구가 멸망하지 않습니다. 정말 급한 일이라면 미리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고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지요!)
지금 여기 함께 있는 사람과, 몸으로 느끼고 표정과 분위기로 소통하는 것. 온라인이 익숙한 이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마음이 건강해지는 길이 열립니다. 쉬운 것을 포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쉬운 것에는 대가가 있으며, 어려운 것에는 보상이 따릅니다.
지금, 손 안의 스마트폰을 보이지 않는 곳에 두고 함께 있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볼까요? 어색하지만 ‘지금 기분이 어때?’ ‘뭐 같이 할래?’라고 물어보면 어떨까요? 이것은 혼자 해서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함께 있는 사람이 동참해야 효과적입니다. 함께 이 글을 읽고, 다 같이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어두고, 지금 여기에 함께 존재하기를.
백수현 계요병원 진료과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brunch story: 마루마루)
* 위 글은 헬스조선의 연재 <당신의 오늘이 안녕하길>의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스마트폰'을 놓으세요]를 통해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