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돌봄에서 시작하는 회복
정신질환을 가진 가족을 돌보는 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과 같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랑하는 이를 돕기 위해 자신의 삶을 잠시 미뤄두게 되는데, 돌봄이 매일 반복되면서 점점 스스로를 돌볼 여유를 잃고 어느새 지친 것도 알지 못한 채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 발달장애 자녀를 돌보던 어머니가 상담실을 찾았습니다. 어머니는 자녀의 상태에 대해 차분하게 이야기하던 중, ‘자녀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고 느낀 순간이 언제였느냐’는 질문을 받자, 갑작스럽게 눈물을 보였습니다. 오랜 시간 감정을 억누르며 지내온 탓에, 쌓였던 마음이 터져 나온 듯했습니다. 그날 상담에서 어머니는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라는 절박한 질문을 남겼습니다.
이 사례는 비단 한 가정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최근 보건복지부의 ‘정신질환자 및 가족 실태조사’에 따르면, 정신질환자를 돌보는 가족 중 61.7%가 돌봄의 부담을 크게 느낀다고 응답했습니다. 그중 자살을 생각한 비율은 20.5%에 이르고, 일부는 구체적인 자살계획을 세운 적이 있으며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돌봄의 무게는 그만큼 무겁고, 그 부담은 가족들의 정신적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돌봄을 맡은 가족들은 종종 ‘숨겨진 환자’라고 불립니다. 환자를 돌보느라 온 신경을 쏟는 동안, 정작 자신이 겪는 어려움은 외부에 드러내지 못하고 묵묵히 견디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심리적, 신체적 피로가 쌓이지만 자신의 고충을 인정하는 일이 마치 이기적인 행동처럼 느껴져 개인의 삶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가족이 돌봄의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 많은 분들이 벼랑 끝에 몰린 듯한 심리적 부담을 느끼는 상황에 이르기 쉽습니다.
그러나 돌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돌보는 것입니다. 마치 산에서 길을 잃은 사람을 구하려면 먼저 나침반과 지도를 준비해야 하듯, 도우려는 사람이 방향을 잃으면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을 돌본다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 나와 돌보는 사람 모두의 건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방관이 사람을 구하기 전에 자신의 장비를 철저히 점검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스트레스가 지속되다 보면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한 에너지가 소진되어 결국 탈진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로 인해 작은 일에도 감정이 크게 요동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환자에게 짜증을 내거나 원망하게 되기도 합니다. 가족의 정신질환을 돌보다 보면 자신을 돌보는 일을 쉽게 뒤로 미루게 되지만, 꾸준한 자기 돌봄 없이 건강한 돌봄을 제공하기 어렵습니다.
먼저 자신의 신체적, 심리적 상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지속적인 돌봄의 핵심입니다. 지금 이 순간, 짧은 시간이라도 나에게 집중해 보세요. 모든 것을 잠시 멈추고 내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차분하게 살펴보는 겁니다. 두통, 불면증, 어깨 결림 같은 신체 반응은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감정 상태를 반영하기도 합니다. 신체와 마음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몸이 보내는 신호를 이해하는 것은 심리 상태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감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짧은 관찰을 반복하다 보면 신체와 감정의 변화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고, 이를 통해 스트레스 상황에서 무엇을 해결해야 할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심리교육을 통해 치료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가족들이 정신질환의 증상과 원인, 치료 과정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습득하면, 환자의 상태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경과 중에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해줄 수 있는 것과 해줄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환자의 행동에 대한 명확한 경계를 설정하여 허용되지 않는 행동에 일관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면 문제 행동이 나타났을 때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비현실적인 낙관보다는 재발 또한 회복 과정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고, 보다 긴 호흡으로 변화하는 환경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충분한 수면, 영양 관리 같은 기본적인 신체 관리뿐만 아니라 나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도 필수적입니다. 구체적으로 자신이 맡고 있는 돌봄 역할과 이를 위해 하루 중 얼마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는지 기록해 보세요. 그런 다음, 나를 돌보는 데 할애하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도 함께 작성해 보세요. 이렇게 정리하다 보면, 자신을 돌보는 방식과 태도를 점검하고 스스로에게 더 친절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돌봄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혼자 짊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특히 위기 상황에서는 주저하지 말고 전문가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정신질환 가족 모임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서로의 돌봄 경험을 나누고 새로운 정보를 공유하며 심리적 지지망을 구축하는 것도 좋습니다. 또한 다양한 정신건강 서비스를 활용하면 돌봄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치매의 경우 노인장기요양보험, 노인 돌봄 종합서비스를 지원받을 수 있고, 그 외에도 지역 사회에서 제공하는 재활 서비스를 통해 정신질환 당사자를 위한 사회적응훈련, 직업훈련, 취업지원 등 추가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적장애, 자폐성장애, 조현병 등과 같이 정신장애등급에 해당된다면 의료비 감면 등의 복지 혜택을 통해 지속적인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어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데 효과적입니다.
결국 돌봄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 동안 달릴 수 있는 체력을 길러야 하고, 고비 구간을 어떻게 넘길지, 언제 속도를 조절해야 할지 계획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마라톤 코치도 필요합니다. 마라톤에서 올바른 자세와 기술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듯, 자신을 보호하면서도 효과적으로 가족을 돕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전문적인 도움을 통해 힘든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돌봄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지받아야 합니다. 비슷한 점은 또 있습니다. 긴 여정 중에는 분명 지치고 힘든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지만, 마라톤에는 ‘체크포인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체크포인트는 일정 거리마다 자신이 얼마나 달려왔는지 확인하고 체력을 점검할 수 있는 지점을 의미합니다. 돌봄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가족과 함께하는 작은 행복을 떠올려보세요. 잠시 마주 앉아 웃거나 함께 나눈 소소한 대화, 볕 좋은 날의 산책이 바로 그 체크포인트가 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젓가락질을 하거나 옷을 갈아입는 진전을 이루었을 때, 하루 일정을 무리 없이 소화하거나 목표한 운동을 마쳤을 때처럼 성취를 함께 한 경험들이 돌봄 과정 중에 느낄 수 있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소중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충분히 누리시기를 바라며, 그 시간이 여러분에게 따뜻한 위로와 깊은 의미로 다가가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오다영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심리 전문가
강등현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조교수
* 위 글은 헬스조선의 연재 <당신의 오늘이 안녕하길>의 ["정신질환 겪는 가족 돌봐야 할 때도"… 중요한 '자기 돌봄' 잊지 마세요]를 통해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