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빗 시네마 WATSEN 크로니클
원래 듄의 팬은 아니었다. 듄이라는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 듄이라는 소설의 존재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지나가다가 얼핏 본 기억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인지 나만 모르는데 다들 기대하고 열광하는 것 같았다.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장르 설명이나 예고편과 같은 영화와 관련된 정보를 보지 않고 보는 것을 지향한다. 듄도 그랬다. 그래도 SF계의 대작이라는 정보는 피할 수 없었다. 좋은 시설이 되어있는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다. 돌비 시네마로 향했다.
돌비 시네마는 보이는 것에 대한 포맷인 돌비 비전과 듣는 것에 대한 포맷인 돌비 애트모스를 만족해야 발급되는 라이센스라고 한다. 암튼 돌비에서 인증한 영화관이라는 것이다. 애플뮤직에서도 돌비 애트모스를 지원한다는 것을 광고하는 것을 본 기억도 난다. 돌비 시네마 듄 상영관은 인기가 많았고 중앙에서 보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앞자리에서 뒷목을 부여잡으며 봤다. 아쉬웠다. 다시 보러 갔다. 이번엔 뒷자리에서 봤다. 뭔가 느낌이 달랐다. 자리마다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참 뒤 탑건: 매버릭이 개봉했다. 다시 돌비 시네마로 향했다. 안타깝게도 사이드 자리였다. 다시 보고 싶었다. 제대로. 어떻게 평일 오전 시간에 시간을 내서 중앙에서 봤다. 다른 영화였다. 이걸 널리 알리고 싶었다. 스윗스팟에서 봐야 진짜 돌비 시네마라고. 심지어 지인 중 탑건이 재미없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2D 영화관에서 봤고 나는 돌비 시네마에서 다시 보길 권했다. 그도 인정했다. 다른 영화였노라고.
이렇게 되니 듄을 스윗스팟에서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알아보기 시작했다.
영상물 감상의 끝은 부동산이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볼륨을 높여야 하는데, 높이려면 적절한 부동산이 필수다. 산속에서 감상하던, 방음에 유리한 지하실이 있는 집에 살던가 해야 한다.
장비도 문제다. 비싸다. 하.. 많이 비싸다. 7.1.4 채널을 구성한다고 하면 일단 스피커만 11개다. 심지어 4개는 천장에 달아야 한다. 천장에 달려면 전월세는 어렵다. 또 부동산이다. 어떻게든 듄을 돌비 시네마급 시설에서 보고 싶기 때문에 드래곤볼을 모으기 시작했다.
스피커와 앰프부터 사기 시작했다. 원래 클립쉬 스피커를 애용하는데, 돌비 애트모스를 구성하는데 많이 사용되는 것도 확인을 하고 클립쉬 스피커로 7.1.4 채널을 구성하기로 했다. 우선 5.1 채널부터 샀고 앰프도 돌비 애트모스와 돌비 비전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으로 구입을 했다. 그리고 화면을 사야 하는데, 화질은 우선 TV라고 들었다. 하지만 크기를 키울수록 지갑은 얇아졌다. 어쩔 수 없이 빔프로젝터로 타협을 했다. 일단 HDR을 지원하고 밝기가 밝은 4K 빔프로젝터를 구입했다. 드래곤볼을 모았다. 이제 이 구슬들을 한데 모아 용신을 소환해야 하는데, 소환할 장소가 없다. 집은 안되고, 따로 구하기로 했다.
하루에 네이버 부동산을 두 번씩 들어갔다. 맘에 들 것 같아 보이는 곳을 세 달쯤 돌았을까, 네이버 부동산에 들어가는 것도 무료해질 무렵 눈에 들어온 지하공간. 부동산에 전화하고 바로 보러 갔다. 찾았다. 여기다. 아무리 소리쳐도 밖으로 소리는 새 나가지 않았다. 일단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해보고 연락드린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나은 곳을 찾을 순 없을 것 같았다. 짐처럼 쌓여있는 무수히 많은 스피커들과 앰프, 그리고 빔프로젝터를 옮길 곳이 필요했다. 결국 계약을 했다. 계약을 하고 생각해보니 취미에 너무 많은 돈을 쓴 것 같았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이래도 되나? 어떻게든 수익으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하며 인테리어를 하기 시작했다. 천장이 텍스로 되어있다. 천장에 스피커들을 달아야 하는데... 하며 생각하는 순간 설마 석면인가?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부동산에 물어보니 석면이 맞을 것이라고 했다. 아뿔싸. 망했다.
취향을 설계하는 곳, 츠타야라는 책에서 머물고 싶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만약 내 머리 위에 있는 천장이 석면이라면 나조차 머물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석면 철거 업체에 연락을 했다. 꽤나 많은 돈을 들여 천장을 열었는데, 사람의 나이는 목주름에서 티가 난다는 것처럼 건물의 나이는 천장에서 드러났다. 다시 막아야 했다. 석고보드를 주문했다. 몸 좋은 친구를 불렀다. 석고보드를 천장 구조물에 대고 있으면 내가 나사로 고정하겠노라 선언하고 3개쯤 붙였을까. 포기를 선언했다. 천장 시공업체를 알아보기로 했다.
부동산 계약할 때는 지하치고 냄새가 잘 안 난다며 좋아했다. 천장을 여니 이곳이 지하가 맞다고 냄새로 알려줬다. 난 머무르고 싶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지하는 환기가 중요하다고 한다. 아무리 공기청정을 해도 근본이 지하공기면 안된다. 근본부터 신선한 친구들을 때려 박아줘야한다. 찾아보니 전열교환기, 환기청정기라는 것이 있었다. 내부 공기를 밖으로 빼고 밖에 있는 공기를 청정하여 내부로 넣어주는 장치다. 내부 공기와 외부 공기를 교차시키면서 열교환까지 이뤄지기 때문에 냉난방에도 좋다고 한다. 공간을 꾸미는데 청정한 공기는 필수였다. 배관을 샀고, 전열교환기를 샀다. 천장을 덮기 전에 천장에 달 스피커 배선과 공기 순환을 위한 배관들을 깔았다. 그리고 천장 시공업체가 왔고, 하루 종일 걸려 3장 붙였던 우리는 역시 돈으로 안 되는 것은 없으며 만약 안된다면 돈을 덜 준 게 아닌지 고민하는 게 맞다는 진리를 다시 깨달으며 페인트 가게를 향했다.
태생이 공대생, 빛 반사를 피하려면 무조건 검은색으로 칠해야 했다. 동생이 극구 만류하며 색을 골랐다. 결국 감성과 실용의 중간쯤 되는 색을 골랐다. 롤러를 샀고 붓을 샀다. 지하 공간의 크기는 대략 35평. 나는 천장을 칠했고 동생은 벽을 칠했다. 여자 친구까지 동원하여 칠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소리 흡음을 도와줄 카펫을 깔기 시작했다. 타일로 되어있어 설치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신발을 벗고 편하게 쉬고 싶었기에 신발을 벗어 놓을 공간에는 데코타일을 붙였다. 흡음을 위해 두꺼운 커튼을 양옆으로 둘렀고 입구에는 레일 조명을 깔았다. 조명을 켰다껐다 할 일이 많을 것 같아 필립스 휴를 이용해 조명을 구성하고 밝기와 전원을 조절할 수 있는 리모컨을 구비했다. 헤드 각도가 조절되며 관리가 쉬운 아쿠아텍스 소파를 구매했고 널찍한 빈백과 거실 테이블을 놨다. 이제 끝났다. 천장에 실링 스피커를 다는 것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스피커를 달고 싶어 스피커 브라켓을 직구했고 돌비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스피커 설치 레퍼런스를 참고해 스피커를 배치했다. 빔프로젝터를 달았고 120인치 스크린도 설치했다. 그리고 앰프에 포함되어있던 마이크를 이용해 스피커 캘리브레이션까지 마쳤다. 아니 근데 소리가 조금 이상하다. 노트북을 가져와 소리를 잡기 시작했다.
노트북으로 소리를 측정해보니 30~40Hz 부분에 공진이 있었다. 조금이 아니고 많이 있었다. 천장이 흔들리는 정도였다. 안 될 것을 알지만 베이스 트랩을 구매했고 전반적인 소리는 더 좋아졌지만 그래도 30~40Hz는 원인 파악을 못하고 있던 도중 열려있던 천장의 모습을 상상했다. 아뿔싸. 천장 내부의 트러스 구조 사이가 30~40Hz 공진을 만들기 최적화되어있었다. 내가 당장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쉽지만 이대로는 끝이 없겠다 싶어 중단했다.
소스 기기로는 애플TV를 설치했다. 웬만한 OTT앱들은 다 있고(쿠팡플레이가 없다..) 빠릿빠릿하면서 애플뮤직이 돌비 애트모스로 재생된다. 그리고 이제 감상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듄이다. 너무 좋았다. 듄을 보기 위해 공간을 계획하고 만들고 해 나가는 과정에 방점을 찍었다는 기쁨도 있었겠지만 좋았다. 빔프로젝터의 밝기가 아쉽긴 했지만 너무 좋았다. 초대했던 친구들 중 화면과 관련되어 개선을 요청한 사례는 없었다. 그리고 대역폭의 문제로 단색의 채워진 배경에서 계단현상 같은 것이 보였지만 내가 말을 꺼내기 전까진 알아챈 사람이 없었다. 말하지 말걸.
놀러 왔던 친구 중 내 블루레이 영상을 감상하려면 어떻게 해?라는 질문에 블루레이 플레이어를 찾아봤다. 아니 내가 생각했던 가격 이상이었다. 수요가 적어서 그런지 가격이 많이 비쌌다. 그 돈으로 블루레이 플레이어 살바에는 조금 더 보태서 엑스박스 사겠다 했다. 그렇다. 엑스박스를 샀다. 블루레이 플레이어보다 재생 성능은 떨어지지만 돌비 애트모스를 지원했다. 그리고 엑스박스 게임 패스를 구독했다. 게임 중 애트모스를 지원하는 게임이 있다는 것을 말로만 들었지 직접 해볼 줄은 몰랐다. 다른 경험이었다.
음악은 놀라웠다. 많이 들었던 하입보이는 나에게 다른 하입보이를 선사했고 애트모스로 믹싱하여 앨범들을 계속 들었다. 그런데 집에서 음악을 듣는데 문득 저 스피커도 좋은 소리를 내주고 있는데, 애트모스로 들으면 어떨까 상상하며 듣고 있었다. 많은 음악들이 스테레오로 되어있어 애트모스 시스템이 되어있는 곳에서 들어봤자 앞에 두 스피커에서만 소리가 나온다. 많이 아쉽다. 많은 음악들이 애트모스로 출시되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물론 무늬만 애트모스 말고 진짜 잘 믹싱 된 애트모스 말이다.
돌비 애트모스로 되어있는 영상들을 쭉 찾았다. OTT에서는 많지 않았다. 넷플릭스는 넷플릭스 오리지널을 빼면 거의 없다. 왓챠에도 조금 있는 편이었다. 어른들의 사정이 있겠지만 나도 어른이다. 애플TV 스토어에서 영화 개별 구매를 통해 많은 돌비 지원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듄, 탑건: 매버릭, 그래비티 등 많은 영화들을 애플TV 스토어에서 구매했다. 내 느낌일지 모르겠지만 애플TV앱을 통해 구매하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은 질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블루레이에 비할바는 못되지만 대역폭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애플TV 스토어에서 영화를 감상할 것 같은 느낌이다.
장소를 소중히 여기고 깔끔하게 사용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장소를 빌려서 쓰고 싶다면 빌려주고 싶었다. 월세도 충당하면 좋고 내가 못쓸 때는 다른 사람이 쓰면 그나마 좋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네이버 예약에 등록하기로 했다.
뭐든 시작하기 전에 이름을 지어야 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여 보고 듣는 공간이니 Watch & Listen을 줄여 WASTEN으로 이름 짓기로 했다. 우리가 추천하는 영화의 목록을 뽑아 Wasten's Wall도 만들었고 네이버 예약에 등록도 했고 제법 그럴싸한 홈페이지도 만들었다(Wasten.app). 나의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 오래간만에 귀와 눈이 즐거운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얻은 교훈은 "돈으로 안 되는 것은 없다. 안됐다면 돈이 부족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