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쯤, 한 지인이 내게 청첩장을 건네주면서 거기에 그려진 그림은 예비 신부의 친구가 그려준 일러스트라며 일러준 적이 있었다. 작고 귀여운 일러스트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림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그 말을 듣고선 '언젠가 내가 결혼을 한다면 나도 청첩장에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다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었다.
그 후로 한참이 시간이 지나 그런 생각했다는 것도 가물가물해질 무렵, 남은 평생을 함께하면 좋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났다. 소개팅으로 처음 만난 날, 차를 마시고 저녁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워 또 카페를 찾아 이야기를 나눴고, 두 번째 만남에서는 점심때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눈 깜짝할 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있었다. '이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것이 무척 즐겁구나'라는 걸 느낀 뒤 세 번째 만남에서 고백을 하고 연인이 되었고, 그 후로 거의 매 주말마다 데이트를 하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1년 여를 함께하면서 서로에 대한 마음이 깊어갈 무렵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고, 곧바로 예식장을 예약한 뒤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결혼식을 준비하며 처음에 청첩장 준비를 떠올렸을 때만 해도, 청첩장에 그림을 그려 넣고 싶어 했던 오래전 그 기억은 잊힌 채, 그냥 청첩장 업체에 제작을 맡겨야겠다는 생각만 있었다. 그런데 올해 1월, 모바일 청첩장에 넣을 사진을 확보할 겸 추억도 쌓을 겸 제주도에서 스냅사진을 찍고 나니, 예전 기억 속에서 청첩장에 그림을 그려 넣고 싶다던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제주도에서 찍은 스냅 사진들
'우리 스냅사진 중 하나를 골라 그걸 직접 그림으로 그려서 청첩장에 넣어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그 말을 들은 짝꿍은 무척 좋다며 신나 하면서도, 내가 그림 때문에 고생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눈치 기는 했다. 사실 옆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지켜본 짝꿍으로서는, 그림 하나를 완성하는데 1년 남짓한 시간이 걸리기도 하는 것을 보고, 청첩장에 너무 과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청첩장에 내가 그린 그림이 들어가는 것을 짝꿍이 긍정적으로 느꼈다면 충분하다 싶었기에, 그림을 그리겠다는 나의 결심은 곧바로 굳혀졌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사진
마침 시기가 딱 좋았다. 제주도에서 스냅사진을 찍었기에 그릴 만한 대상이 있었고, 그림을 배우던 그림 스튜디오에서는 이제 정규 커리큘럼을 따라가는 코스를 지나 내가 관심 있는 주제를 택해 그릴 수 있는 코스에 진입하기도 했다. 그 코스의 첫 번째 그림으로서 셀프 청첩장을 그린다는 것은 무척 멋진 일이 아닐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크긴 했다. 스냅사진을 예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재료로는 가장 먼저 오일파스텔이 떠올랐는데, 오일파스텔로 풍경 그림을 그려본 경험을 떠올려보면 얼굴 같은 세밀한 표현을 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것은 그렇다 치고, 자칫 잘못하다 얼굴을 그리면서 그림을 망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또한 11월 결혼식으로 앞두고 8월 말 정도에는 그림이 완성되어야 청첩장을 만들고 지인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기에, 마감 기한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고, 그림이 완성된다면 지금까지 그렸던 그 어떤 그림보다도 뿌듯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새로운 코스의 첫 그림으로는 청첩장 그림을 그리겠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린 뒤, 언제나처럼 밑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2월 초였다.
밑그림을 그리면서 쉽지 않았던 게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나무, 그리고 두 번째는 '내 얼굴'. 사실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다들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신부 얼굴을 이상하게 그리면 어떡하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애정이 담긴 덕분인지 이외로 짝꿍 얼굴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그릴 수 있었던 반면, 내 얼굴은 아무리 고치고 들여다봐도 썩 뭔가 닮지도, 마음에 들게 그려지지도 않는 느낌이었다. 오일 파스텔로는 세부 묘사가 어려웠기에 스케치 또한 그것을 감안해 너무 세밀 묘사는 피하도록 선생님께서 지도하셨지만,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꼭 묘사가 부족하기 때문 만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일단은 스케치를 마무리해 나갔으나, 또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이전에 그렸던 오일파스텔 그림의 작업 기록을 보니, 지금의 속도라면 11월 초인 결혼식이 지나서야 완성이 될 것 같았다. 마감에 대한 걱정이 들기 시작한 게 5월 초였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그때부터는 매 주말 2번의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스튜디오의 한 번의 수업에서는 2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는데, 2번의 수업을 들으니 주말에 4시간씩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 번에 연이어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조금 더 속도가 붙어 다행히 5월 말에는 스케치를 완성할 수 있었다. 오일파스텔 그림이 혹여나 완성되지 못한 다면 이 스케치라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아 약간은 안심이 되었고, 마침 6월에 스튜디오 촬영이 잡혀있어 소품 사진으로 찍기도 했다. 사진작가님께서 그림을 보시더니 신기해하셨고, 그 덕분인지 무척 정성 들여 그림 사진을 연출해 주셔서 매우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연필스케치 완성작
웨딩촬영 사진작가님께서 찍어주신 사진
오일파스텔 작업에 돌입 후, 하늘과 나무의 배경이 어느 정도 틀이 잡혔을 때 그날의 작업 사진을 본 짝꿍이 말했다. '사진보다 더 예뻐!'
내가 보기에도 하늘의 색감이나 나무의 푸릇푸릇함이 사진 보다 마음에 들었고, 짝꿍까지 좋아해 주니 작업하는 보람이 있었다. 매주 수업이 끝나면 항상 짝꿍에게 보여주고는 했는데, 매번 좋은 반응을 해주기도 지겨울 법 한데 항상 진심 어린 기쁨을 표현해 줘서 나도 신이 났다. 하지만 수업을 2번씩 듣는 데다 점점 더 세심한 표현들을 해야 하다 보니 체력적으로 지치는 것이 느껴졌다. 예를 들어 아래 그림처럼 처음으로 우리의 옷을 채워 넣었을 때는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나면 망친다는 생각에 정말 조심스레 색을 칠해나갔고,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 뻗어서 잤던 기억이 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린 날에는 정말로 체력이 방전되었다
처음에는 사람 자체를 그리는 것이 스트레스였는데, 옷을 어느 정도 그리고 나니 그에 비할 수 없는 정말 큰 관문이 남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바로 '얼굴'.
이때부터는 정말 회사에서 있으면서도 문득문득 '얼굴 어떻게 그리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근데 걱정만 쌓일 뿐, 막상 연습을 하려니 시간도, 집중도 잘 되지 않았다. 6월에 스튜디오 촬영을 끝냈을 때만 해도 결혼 준비가 꽤 할 만한데 싶었으나, 7월부터 우리의 보금자리를 알아보고 집을 계약하고 인테리어 및 가전과 관련된 내용들을 살펴보고 체크하다 보니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그래도 잠시 짬을 내어 얼굴만 따로 그리는 연습을 해보았으나, 원하는 만큼 집중과 노력이 쏟아지지 않아 마음속 두려움은 해소되지 않았다.
연습의 흔적. 나름 연습한다고 연습했으나 지금 돌이켜보니 정말 대충 했구나 싶다...
결국 망치더라도 얼굴을 그려야만 이 관문을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8월 둘째 주 수업에서는 마음을 다 잡고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무모했는지, 내 얼굴을 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이 나를 저지하셨다. '네 안경이 너무 삐뚤어져있어. 그렇게 그리다가는 망칠걸? 일단 지워야 해.'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멀리서 보니 안경이 정말 삐뚤어져 있었다. 게다가 색연필이 오일파스텔로 어느 정도 덮인 다는 사실조차 선생님 말씀을 듣고서야 알았다. 다행히 선생님 말씀을 듣고 회복이 가능했지만, 만약 덮어서 지워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림 시작 때부터 얼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치고는 너무 준비 없이 무모하게 작업을 시작한 것 같아서 반성의 마음이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어찌 되었건 두려워하던 지점을 일단 넘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확실히 얼굴 작업을 시작하니 그림의 완성도가 한층 높아졌고, 세부적인 디테일을 하나하나 마무리해 갔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내 얼굴이 나를 괴롭혔다. 표정도 어색하고,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거의 마지막 수업까지 가서야 내가 턱의 명암을 완전히 잘못 인식하고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부분을 고치고 나니 한결 나아 보였다. 그리고 더 이상 손댈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곧이어 선생님도 '이제 끝내도 되겠는데?'라는 말씀을 하셨고, 내가 봐도 이 정도면 마무리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색연필과 오일파스텔을 정리해 넣어두고, 손에 묻은 파스텔을 닦아낸 뒤, 테두리에 붙여 둔 마스킹 테이프를 천천히 뜯어내기 시작했다. 1/3 쯤 뜯고 나니 울컥하는 느낌이 올라왔다. 끝냈다는 안도감인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공들여 그린 그림을 선물하게 될 사람이 내 짝꿍이라는 것이 감사하고 감격스러워서 느끼는 감정 같기도 했다. 그리고 마감 기한을 지켰다는 뿌듯함도 컸다. 돌이켜보면 5월 초부터 수업을 2번씩 듣기 시작한 건 정말 적절한 선택이었다.
완성된 그림
완성된 그림은 내가 봐도 참 예뻤다. 지인들에게 청첩장을 나눠주면서 '이거 제가 그린 그림이에요.'라고 자랑하고픈 그런 그림을 완성했다. 그날 저녁 그림을 선물 받은 짝꿍도 그림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사진으로 중간 작업물을 보여준 적은 있지만, 실제로 그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고, 직접 보니 더 예쁘다고 감동하며 한참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림은 청첩장에 넣기 위해 그리기 시작했지만, 완성된 그림은 우리의 새로운 집에 걸어둘 예정이기도 하다.
왜 오래전 그때, 청첩장에 내 그림을 넣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을까. 돌이켜보면 단순히 청첩장에 예쁜 그림을 넣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청첩장에 그림을 손수 그려 넣는 정성을 쏟고 싶게 만드는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싶다.'라는 마음도 컸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너무나 감사하게도 그런 사람을 만났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청첩장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금 떠오른 것 아닐까.
청첩장 그림을 시작하면서 생각했던 것 중 하나는, 결혼을 준비하는 것이 하나의 즐거운 일이 되기를 바랐고, 그걸 그림에 담아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예상치 못했던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왠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림을 그리면서 진행한 반지 고르기, 드레스 고르기, 스튜디오 촬영, 양가 부모님 뵙기, 집 구하기 등등 엄청난 일들이 모두 즐거운 데이트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목표하던 마감 기한까지 스스로 만족할 정도의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이 컸다고 생각한다.
청첩장 그림을 그린 이야기를 들은 지인들은 '그것을 그리기 위해 오랫동안 그림을 배운 거구나!'라는 말을 던졌는데, 처음에는 농담으로 받아들였으나 이내 어쩌면 그게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무언가를 그려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림을 배워왔으니, 청첩장 그림이라면 그것의 좋은 예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그림들의 초기작으로서도 멋진 역할을 해주리라 생각한다.
이제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이 그림이 담긴 청첩장을 건네며 결혼 소식을 전할 생각을 하니, 정말로 이제 결혼식이 가까이 다가왔구나 싶다. 그리고 청첩장을 받는 분들이 좋아해 주셨으면 하고 바라본다. 청첩장 그림을 그리면서 느꼈던 마음들과 노력들을 고스란히 담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