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를 잃은 대학
기성세대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는 국내 대학은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지방거점국립대와 서울 소재 대학 몇 곳이 전부였고, 그 희소성 덕분에 대학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높았다. 소수에게만 허락된 기회였고, ‘대졸’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사회적 신뢰와 기대를 담보하는 증표였다. 가치는 언제나 수량과 반비례한다. 에르메스의 버킨백이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이유 역시 아무나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상위 몇 개의 대학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대학은 사실상 가치가 소멸했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입학할 수 있다. 부유층 자녀나 외국인들이 특별 전형을 통해 비교적 쉽게 명문대에 입학하는 사례들은 공정한 경쟁이라는 허울 뒤에 감춰진 대학의 상업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노력의 대가여야 할 학위가 돈으로 구매 가능한 상품으로 전락한 순간 그 내재적 가치는 빛을 잃기 시작한다.
대학은 말 그대로 큰 학문을 뜻하지만, 실제 학부 졸업생들에게 물어보면 “배운 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답이 대부분이다. 많은 학생들은 대학의 네임밸류로 자존감을 채울 뿐, 학문적 성취는 미미하다. 수업은 16주 동안 전공 서적 내용을 지엽적으로 늘어뜨려 다루고, 교육의 질은 낮다. 교수는 교육보다 연구가 본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학습에 대한 책임을 과제와 발표로 학생에게 떠넘기는 경우가 많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대학은 국가가 세수를 낼 직장인을 양성하는 기관일 뿐이다. 자신의 내적 가치를 학력으로 끌어올리려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다. 대학에서 16주 동안 배우는 내용은 도서관에서 책 몇 권만 읽어도 금세 습득할 수 있다. 실제로 대학 4년 과정은 마음만 먹으면 6개월이면 독학으로 소화할 수 있다.
일론 머스크도 대학은 과제를 제때 제출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곳, 그리고 또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곳 정도로 여겼다. 쉽게 휘발되는 전공 수업보다 전문가가 쓴 책 한 권이 인생에 더 도움이 된다. 부동산이나 뇌과학에 관심이 있다면 16주짜리 교양 수업보다 관련 서적 세네 권을 읽는 것이 훨씬 낫다. 도서관은 언제나 열려 있으며, 그것도 우리가 낸 세금으로 운영된다.
내가 수강했던 조직행동론 모 교수는 “상사가 기분이 안 좋을 때 ‘술 한잔 하시죠’라고 말하며 기분을 풀어드리라”라고 가르쳤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책 ‘세이노의 가르침’에서 수천억 자산가 세이노는 "회사업무에 최선을 다하되 퇴근 후의 시간은 온전히 자신의 발전을 위해 만전을 기하라"고 역설했다. 당신은 교수와 기업가, 둘 중 누구의 조언을 따를 것인가? 대학이 양성하는 것은 창의적 기업인이 아니라 좋은 직장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큰 야망을 품은 사람에게는 상사의 푸념을 들어줄 시간은 없다는 말이다.
칸예 웨스트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들었고, 버질 아블로는 토목학과 출신이지만 루이비통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다. 하버드를 자퇴한 빌 게이츠와 마크 저커버그의 사례는 더 이상 특별하지도 않다. 이들은 대학이라는 제도적 틀이 자신의 비전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좁고 비효율적임을 깨달았을 뿐이다.
만약 경영학 교수가 정말 경영을 잘한다면 전문 경영인 팀 쿡처럼 애플을 운영하지 왜 교수로 남겠는가? 경제학 교수가 정말 경제를 꿰뚫고 있다면 펀드나 주식으로 부를 쌓지 왜 강단에 서 있겠는가?
우리 모두 정답은 알고 있지만, 세상의 관성을 이기지 못했을 뿐이다.
내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 졸업장을 받으려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대학의 무용함을 더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중퇴자의 핑계가 아닌, 졸업자의 증언으로써 내가 겪은 경험과 성찰을 나누고 싶다. 대학이라는 간판이 주는 얄팍한 자존감에 의지하기보다 우리 스스로 가치를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할 때다. 이제 우리는 학점에 목숨 걸 시간에 책 한 권을 더 읽고, 불필요한 술자리 대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시간을 쏟아야 한다. 대학의 낡은 권위에 안주할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라는 더 넓은 대학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할 것인지, 그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