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희곡 우솔미 - <블랙> 감상문
모든 갈등의 해결은 편견을 제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현대 사회문제의 가장 큰 키워드는 누가 뭐래도 ‘혐오’와 ‘차별’이다. 2021 신춘문예 당선작 <블랙>은 편견에서부터 비롯된 혐오와 그로 인해 해결되지 않는 사회문제를 꼬집는다.
작품은 수용이 벽을 허물고 창문을 만들기 위해 친구 이리를 집으로 초대해 함께 벽을 허물어가는 이야기이다. 이 와중에 수용의 아랫집에 홀로 사는 노파의 모습이 함께 보인다. 수용은 과연 아랫집 노파와 갈등하지 않고 벽을 허물고 창문을 만들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단순히 벽을 허무는 이야기가 아니다. 본래 희곡과 연극이라는 것이 그렇듯 개인적이고 단편적인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거대한 사회적 담론을 꺼낸다. 수용의 친구 이리는 서른 살의 여성으로 레즈비언이다. 그리고 부모님께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성소수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꼬집는다. 이리가 부모님께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이리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통상적으로 여전히 편견과 차별을 넘어 혐오까지 받고 있는 성소수자들을 대변한다.
주인공 수용 역시 보통의 인물은 아닌 듯 보인다. ‘데드 타임’이라는 수시로 ‘자살할 것 같은’ 시기가 찾아온다. 이리의 말을 통해서 묘사되는 수용은 삶에 대해 비관적이고 어딘가 우울한 모습을 자주 드러내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맹인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다. 이런 수용의 모습에서 현재의 20대 청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체로 모호하고 우울하고, 답답함을 수시로 느낀다. 그들에게는 팍팍한 현실에서 벗어나 잠깐이라도 넓고 활기 넘치는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이 필요하다. 작가는 그래서 수용을 ‘모’ 아니면 ‘도’, ‘닫힘’ 또는 ‘열림’의 이분법적인 생각을 가진 ‘확실한’ 청년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맹인학교 설립에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행동하는 수용처럼 고난과 우울함에 사로잡힌 청년들에게서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은 관심과 행동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이리: 포차, 막걸리 온갖 술집이 줄 서 있더만, 워싱턴 노래방 간판이 애들 하굣길을 밝혀 주겠지. 이 동네보다는 그 동네가 백번 나아. 안 그래?
안타깝지만 맹인 학생들은 ‘워싱턴 노래방 간판’의 불빛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맹인학교 설립에 있어서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있으나 수용은 맹인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블랙’은 이런 무지의 상태를 뜻하면서도 아무런 색도 입혀지지 않은 선입견과 편견이 없는 가장 투명하고 깨끗한 상태이다.
레즈비언은 이리는 사람들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랫집 할머니는 수용을 오해해 그를 때린다. 이리는 아랫집 할머니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바라본다. 아파트 주민들은 맹인학교 설립에 대해 ‘집 값이 떨어지는 문제’와 같이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이런 서로에 대한 편견은 결국 아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할머니가 수용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고 맹인학교 설립 찬성에 서명을 하면서 수용과 이리 역시 할머니에 대한 편견화 오해를 해소한다. 이로써 ‘맹인학교 설립’이라는 사회적 문제 하나가 해결될 실마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편견으로 시작된 갈등은 편견을 제거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주제적 메시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동시대적인 주제를 스릴 넘치는 극의 전개를 통해서 훌륭하게 풀어냈다. 특히 ‘날카롭고 반짝이는’ 무언가를 든 노파가 초인종 렌즈 너머로 보이는 장면은 다양한 영화 속 ‘클리셰’로 많이 봐왔던 장면을 연상시켰다. 최근에 영화 <기생충>을 보고 난 후라서 초인종 너머 비를 쫄딱 맞고 서있던 ‘문광’ 이모가 생각이 났다. 클리셰는 괜히 클리셰가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어떤 지점을 건드리는 확실한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영화가 아닌 연극에서 보인다면 분명히 신선하게 작용할 것이다. 무대 지시문에서 설명하듯 영상으로 보이는 노파의 모습은 독자가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다. 또 작품을 다루는 연출가는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연출을 구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노파의 ‘과도’는 어떠한 메타포를 담아낸다. 많은 작품을 보고 감상평을 남기다 보면 작은 소품 하나하나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과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겠지만 나는 수용의 타인에 대한 관심의 상징으로 보였다. 수용은 시끄러운 ‘록음악’과 ‘소음’들 와중에도 노파의 “지랄하고 있네”라 말하는 대사와 과도를 떨어트리는 소리에 반응한다. 이것은 수용이 “그럼 귀는 문이 아니잖아. 닫히질 않아. 가끔은 닫혔으면 좋겠지만”라고 말하지만 항상 귀를 열어두고 있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무의식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이런 과도는 렌즈 너머로 보이는 노파의 모습에서 명확히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리는 노파를 편견을 가지고 바라본다. 이것은 어쩌면 날카롭고 반짝거리는 칼에 대한 편견이다. 칼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맛있는 과일을 잘라줄 수도 맹인학교 설립에 찬성하기 위해 연필을 갂을 수도 있다. 맹인학교 설립이 집값을 떨어트린다는 우려가 있지만 맹인 아이들에게는 빛과 희망인 것처럼
ⓒ예술도서관 에디터 박두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