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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아: <라흐 헤스트>

시인 이상과 화가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변동림)의 이야기


뮤지컬 <라흐 헤스트>

시인 이상과 화가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변동림)의 이야기



뮤지컬 <라흐헤스트>는 2004년 2월 29일 향안이 던진 ‘사람이 가도 남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과 1936년 2월 29일 동림이 던진 ‘모더니티의 본질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 작품은 예술 평론가이자 화가, 그리고 시인 이상과 화가 김환기의 아내인 ‘김향안(변동림)’의 이야기이다. 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으로, 이상과 함께했던 시절엔 변동림으로, 이상이 죽음을 맞이한 이후 김환기와 함께하게 되며 김향안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죽음을 앞둔 향안은 과거를 돌아보며, 예술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동림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역순행으로 진행되는 향안의 시간과 순행으로 진행되는 동림의 시간이 만나게 되는 과정을 통해 동림이 향안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녀의 예술에 대해 그린 작품이다. 제목인 <라흐 헤스트>는 김향안의 글 중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는다 (Les gens partent mais l’art reste)’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이상은 누구나 아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고, 김환기는 현재까지 거래된 한국 화가의 작품 중 가장 높은 거래가를 기록한 작품 10점 중 9점을 차지한 대표적인 추상화가이다. 하지만 이들의 아내이자 동반자, 함께 예술을 나눴던 김향안의 삶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1937년 일본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이상의 마지막을 지키고, 그의 작품들이 인정받을 수 있도록 힘을 쓴 것도, 1974년 김환기가 사망한 후 환기 재단(1978)과 환기 미술관(1992)을 설립한 것도 김향안이다. 뮤지컬 <라흐 헤스트>는 평생 예술과 함께 살았으며, 결국 예술 그 자체로 남은 그녀가 얼마나 단단한 사람이었으며, 주체적인 삶을 살았는지를 그리고 있다.


뮤지컬 <라흐 헤스트>의 무대는 김환기 화백의 <우주>가 형상화된 무대이다. 공연에서 보여주는 삶의 순환과 점 하나 하나에 담겨진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무대에 녹여진 것이다. 환기의 넘버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서는 <우주>가 형상화된 무대 위에 그의 또 다른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그려지며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로써 그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점 하나 친구들 하나, 점 하나 그리움 하나
점 하나 눈물 하나, 점 하나 당신 나 하나
우린 서로 만날 순 없을 것 같아도
연결되어 있는 우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M6.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뮤지컬 <라흐 헤스트>中



뮤지컬 <라흐 헤스트> (L'art reste) 공연 사진



각설탕만 만지작 만지작: 동림과 이상


동림의 시간은 시인 이상과 처음 만났던 1936년 경성의 낙랑파라에서 시작된다. 예술을 예술로 바라보지 않던 시대에 태어났던 동림은 예술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 눈으로 예술가와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은 곧 예술이 된다. 이상과 결혼한 동림은 단지 그의 배우자가 아닌 그의 예술이 완성될 수 있었던 에너지이자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이상은 자유로운 글을 쓰기 위해 홀로 동경으로 떠나고자 한다. 이상은 동경에서 불령선인으로 체포되고, 폐결핵으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동림은 결혼 3개월이 되던 시기에 남편을 타지로 떠나보내 혼자가 되고, 죽기 직전 동경에서 다시 만나 그의 유해를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함께 베토벤과 모차르트 음악을 듣는 밤
그 밤을 함께 살아내고
도스토옙스키의 단어 사이에서 우리만의 언어를 찾아내는 일
- M9. 예술가와 함께 산다는 건

뮤지컬 <라흐 헤스트>中



동경으로 떠나는 것을 허락한 동림에게 이상은 한없이 나약한 자신을 바라보며 ‘어떻게 그렇게 단단할 수 있을까’라고 이야기한다. 동림은 태어날 때 부터 단단한 사람이었을까? 그 상황에서 동림이 단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상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의 예술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상과 사별한 동림은 슬픔에 잠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글을 쓰며 슬픔을 이겨낸다. 그녀는 충분히 단단하고 용기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슬플 때 진심을 다해 슬퍼하고, 그 힘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김환기의 1970년 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좌), 1971년 작 우주(Universe)(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향안과 환기


향안의 시간은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인 2004년, 그녀가 평생 동안 기록해온 일기장에서 시작된다. 남편인 환기가 세상을 떠나고,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향안은 미술 평론가 뿐만 아니라 화가가 된다. 이상과 사별하고 7년이 지난 후 두 사람은 처음 만난다. 환기는 자신의 그림을 담은 편지를 향안(동림)에게 보내고, 그녀는 답장으로 자신이 소설을 보낸다. 그녀는 작은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환기의 아호(雅號)인 ‘향안’을 자신에게 달라고 하며 다시 한 번 예술가와 사랑을 하게 된다. 향안은 환기가 더 넓은 세상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파리에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미국으로 건너가기도 하며 서로의 예술이 된다.



환기: 미술 평론가로서 당신은 현상 너머를 보는 눈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을 솔직하게 문자화 시키는 힘도 강하고.
향안: 그림 보는 일일 점점 더 재미있어지네.
더 탐구하고, 더 공부하고 싶어.
향안: 어디든지. 새로운 모험이면.
- M12. 너로 인하여

뮤지컬 <라흐 헤스트>中



환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또 다시 혼자가 된 향안은 그림을 그리며 그 아픔을 이겨낸다. 화백 김환기의 아내가 아닌 화백 김향안의 이름으로 그림을 그려내며 환기가 사라진 자리를 채워나간다. 어떻게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해서 잃기만 했던 삶을 살아온 그녀지만, 그들 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내며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예술로 남겼다.



뮤지컬 <라흐 헤스트> (L'art reste) 공연 사진



변동림으로 남아: 동림과 향안


향안과 동림의 시간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향안은 이상의 유해를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온 동림을 만난다. 가장 큰 슬픔을 겪었던 시기의 동림은 향안에게 시인과의 짧았던 사랑을 후회하지 않으며 그 찰나를 평생 추억하겠다 이야기한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사람이었으며, 과거의 자신을 위로하고 안아주며 이제는 괜찮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남긴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는다’는 말 처럼, 누군가에 그리움은 예술이 되어 그녀를 성장하게 만들어주었다.



우리 과거는 내가 이 시간 속에서 잘 지킬게.
넌 뒤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계속해서 꿈을 꾸고, 멈추지 말아줘.
- M20. 변동림으로 남아

뮤지컬 <라흐 헤스트>중



슬픔을 간직한 사람이 그 슬픔을 이겨내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때의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나와 마주하기 위해서는 슬픔의 깊이만큼의 용기가 필요하고, 그 용기를 내는 것은 쉽지 않다. 뮤지컬 <라흐 헤스트>는 그 용기와 성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동림이 자신의 사랑과 예술을 믿으며 단단해질 수 있던 것 처럼, 우리 역시 각자의 선택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너의 느낌표를 믿어’라는 향안이 동림에게 해주는 이 대사처럼 말이다. 스스로에게 손을 내밀어 위로를 해주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 작품의 여정이 이 작품을 보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위로와 용기, 선한 영향력이 되어줄 수 있다. 이것이 이 작품이 소중한 이유이고, 창작 초연 뮤지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랑을 받고있는 이유이다.




글: 예술도서관 에디터 리니


예술도서관 아카데미 3기 졸업생 리니는 지난 3년 동안 300회가 넘는 관극을 하며 예술의 힘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짧게는 90분, 길게는 약 180분 동안 무대 위에 펼쳐지는 세계가 위로가 되고, 용기와 힘을 주는 과정을 보면서 누군가에게는 그냥 흘러가는 시간일지 모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시간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작품을 보고 친구가 해줬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만약 이 작품이 흥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한 사람이라도 변화시켰다면 성공한거다. 나를 변화시켜주었기에 이 작품은 성공한 작품이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는 작품을 알리고 싶고, 더 나아가 그런 작품을 만드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한 작품이라도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창작자라 생각하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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