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변화에 대한 공포:NT Live <엔젤스 인 아메리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 하는 이유

NT Live <엔젤스 인 아메리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 하는 이유



 NT Live는 영국 국립극장에서 진행했던 공연 실황 영상을 촬영하여 송출하는 프로그램으로, 영국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작품들이 상영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꾸준히 상영되고 있으며, 연극 <리어왕>, <로미오와 줄리엣>,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등의 작품이 상영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공연 생중계가 활성화되기 전인 2009년 부터 NT Live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 코로나19로 극장에서 공연 뿐만 아니라 영화를 관람하는 것조차 위험해지자, NT Live 영상을 볼 수 있는 OTT 서비스인 ‘NT at Home’을 시작하였다. 월 구독료 £9.98 (약 16,000원)을 내면 서비스 중인 모든 작품을 감상할 수 있으며, £5.99 (약 10,000원)으로 개별 작품을 72시간 동안 렌탈해서 감상할 수 있다. 처음 오픈한 2020년에는 11개의 작품만 감상할 수 있었으나, 현재는 계속 추가돼서 훨씬 많은 작품을 볼 수 있다. 그중 2017년에 영국 국립극장에서 공연되었던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part.1: 밀레니엄이 다가온다>와 <엔젤스 인 아메리카 part. 2: 페레스트로이카>를 관람하였다.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작년 12월 명동예술극장에서 한국 프로덕션이 공연되기도 했는데, 당시 코로나19 확산 이슈로 공연이 취소되고, 공연 시간이 변동되기도 하며 진행되었었다. 12월에 공연되었던 <엔젤스 인 아메리카 part.1: 밀레니엄이 다가온다>에 이어 올해 2월 <엔젤스 인 아메리카 part.2: 페레스트로이카>가 개막했지만, 프로덕션 내 코로나19 확산 문제로 조기 폐막하였다. 1980년대를 덮친 전염병 ‘AIDS’를 다룬 이 작품이 또 다른 전염병으로 인해 중단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사진 출처: https://www.vox.com/platform/amp/culture/2018/4/30/17199540/angels-in-america-2018-broadway-n


밀레니엄이 다가온다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총 2부작, 약 8시간의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미국 극작가 ‘토니 쿠슈너’의 작품이다. 1991년 초연한 이후 6부작의 드라마로 제작이 되기도 하였으며, 각종 시상식에서 수상한 작품이다. 에이즈와 동성애,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인 ‘사랑’과 인간의 본능인 ‘나아감’과 ‘변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기독교, 유대교과 몰몬교에 대한 배경지식을 알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꼭 이에 대해 완벽히 알고 있지 않아도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기에 작품의 주제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1980년대 미국 사회를 둘러싼 사건들, 에이즈를 게이병이라고 부르던 사회의 분위기, 무고한 시민이 간첩죄로 사형당했던 로젠버그 부부 사건 등에 대해 미리 알고 본다면 작품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Part. 1: 밀레니엄이 다가온다>는 작품의 발단과 전개 과정을 담고 있다. 동성애자 프라이어는 자신의 연인 루이스에게 에이즈에 걸렸음을 고백한다. 루이스는 연인이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아야 한다는 두려움에 프라이어를 떠난다. 홀로 남은 프라이어는 연인을 잃은 슬픔과 에이즈의 고통에 괴로워하고, 천사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목소리만으로 나타나던 천사가 프라이어 앞에 직접 등장하며 1부가 끝난다. 프라이어와 루이스를 중심으로 한 내용 소개였지만, 작품에는 두 사람 외에 로이 콘, 조, 하퍼, 벨리즈, 한나 등의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마저 숨기며 명예만을 쫓는 악마의 변호사 ‘로이 콘’, 몰몬교인이지만 뒤늦게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조’, 몰몬교인 발륨 중독자이자 조의 아내인 ‘하퍼’, 흑인 동성애자이지만 높은 자존감과 넓은 포용력을 가진 ‘벨리즈’,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전화를 받고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뉴욕으로 이주하는 조의 엄마 ‘한나’라는 뚜렷한 캐릭터성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프라이어’는 미국 주류 지배 계급인 WASP이지만 동성애자이며 에이즈 환자이고, ‘루이스’는 유대인 동성애자이고, 법원에서 일을 한다.


밀레니엄, 즉 새천년이 다가온다는 공포는 등장인물 모두를 움직이게 한다. 그들에게 공포는 단지 2000년에 다가오는 것이 아닌, 치료 불가능한 에이즈라는 질병, 굳게 믿고 있던 종교의 붕괴, 상식의 변화이다. 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것이 인물들이 이 공포를 이겨내는 방법이다. 1부에서는 이 공포를 마주한 인물들의 갈등만을 그리기 때문에 약 4시간의 작품을 보고 나와도 ‘도대체 이게 무슨 내용이야?’ 하는 생각이 들 수가 있다. 총 3막의 1부 공연 동안 그려지는 것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그들의 갈등뿐이기 때문이다. 프라이어와 헤어진 루이스가 조를 만나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 계시의 시간이라는 프라이어의 꿈과 하퍼의 환각이 만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 실존 인물이기도 했던 악마의 변호사 로이 콘의 에이즈 감염은 무대 위에 돌아가는 턴테이블처럼 우리를 혼란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https://www.vox.com/platform/amp/culture/2018/4/30/17199540/angels-in-america-2018-broadway-n


페레스트로이카


 천사는 프라이어에게 예언자라고 이야기하며, 인류가 이주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주어진 예언자라는 직책을 받아들이고, 천국으로 떠난다는 선택지는 그가 에이즈의 고통, 사랑의 아픔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하지만 프라이어는 하퍼와 한나, 조와 짧은 동거를 하다 다시 돌아온 루이스, 벨리즈를 통해 에이즈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인간으로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이런 프라이어의 선택과 반대의 선택을 하는 인물은 ‘로이 콘’이다. 수많은 부정을 저질렀고, 죽을 때까지 변호사의 명예를 지키려고 했던 로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거부한다. 처음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것을 간암이라고 발표하도록 하고, 동성과 성관계를 맺은 사실도 그들이 원했기 때문이라며 자기합리화를 한다. 두 사람은 에이즈라는 같은 병을 앓고 있다. 프라이어는 삶을 포기하는 듯 하지만, 그 포기의 과정에서 나를 마주하는 방법을 배우는 반면, 로이 콘은 살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결국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이하는 대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각자의 선택에는 정답이 없지만, 나아가는 자와 남겨진 자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나아가기 위해서는 때론 두려움과 직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 프라이어는 5년 뒤를 그리는 에필로그에서 루이스와 벨리즈, 한나와 함께 등장한다. 처음 에이즈에 걸렸던 1895년에 비해 건강해 보이는 모습으로 그는 ‘The world only spins forward.’라는 대사를 한다. ‘우리는 단지 나아갈 뿐이다’라고 번역이 된 문장이지만, ‘spin’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된다. 1부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복잡하고 난해한 갈등이 이 단어 안에 담겨 있다. 세상은 언제나 복잡한 미로를 걸으며 나아가고 있고,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사랑과 화합, 연대를 통해 이 미로를 탈출해나가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다가오는 변화에 대해 자신만의 선택을 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그리며 우리에게 자신의 옳음이 정답이라 생각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메세지를 전달한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1985년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2022년 현재에도 반복되며 이어지고 있는 이야기이다. 또한, 미국은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살고,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 되는 국가라는 점은 작품이 가진 보편성을 보여준다. 시간은 흐르고 있지만, 비슷한 일은 세계에서 계속해서 발생한다. 동성애 혐오, 인종 차별, 질병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으며, 특히, 미국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진행형인 문제이다. 작품 속에서는 인식의 틀을 깨고 시각을 확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나오지만, 2022년의 한국 사회는 깨야 하는 인식의 틀을 더 강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이 우리 사회를 변화할 수 있는 작은 원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간은 언제나 불안정한 존재이며, 안정을 찾아 떠나는 것이 평생의 목표이자 과업이다. 하지만 그것은 평생을 노력해도 불가능한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인간과 불안정함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 인물들에게 닥친 ‘밀레니엄’이라는 공포는 사실 그 시대에 갑자기 생겨나서 그들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 이 공포는 언제나 우리 주변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시대가 변화하며 옳다고 생각했던 정의가 깨지고, 자신을 둘러싼 시각의 틀이 부서지며 혼란이 도래하였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 인물들이 밀레니엄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 불안정함을 즐기며 살아야 한다. 그때 우리는 나아갈 수 있다




글: 예술도서관 에디터 리니


예술도서관 아카데미 3기 졸업생 리니는 지난 3년 동안 300회가 넘는 관극을 하며 예술의 힘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짧게는 90분, 길게는 약 180분 동안 무대 위에 펼쳐지는 세계가 위로가 되고, 용기와 힘을 주는 과정을 보면서 누군가에게는 그냥 흘러가는 시간일지 모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시간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작품을 보고 친구가 해줬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만약 이 작품이 흥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한 사람이라도 변화시켰다면 성공한거다. 나를 변화시켜주었기에 이 작품은 성공한 작품이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는 작품을 알리고 싶고, 더 나아가 그런 작품을 만드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한 작품이라도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창작자라 생각하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아: <라흐 헤스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