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북한 주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마주하다
극단 고래는 <고래, 혐오의 물결을 거슬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에 대해 질문하고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2022년에는 ‘남북문제’를 키워드로 삼아 <분단 이데올로기, 그 뿌리 깊은 상처를 보듬어>라는 소제목으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며 리서치와 스터디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연극 <벗>이다.
연극 <벗>은 1988년 북한에서 출판된 백남룡의 장편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2020년 5월 미국 콜롬비아대학에서 번역되어 출판한 이 소설은 작가가 이혼 직전의 젊은 부부의 이야기를 관찰한 이야기로 미국의 라이브러리 저널에서 ‘2020년 최고의 세계 문학 중 하나’로 선정되었고, 이후 프랑스에서도 번역 및 출판되어, ‘한반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소설이 무대화되는 과정에서 다채로운 연출 요소들도 연극을 보는 재미를 한층 더한다. 무엇보다 관객을 사로잡는 것은 일곱 살 난 아이 호남이 퍼펫을 통해 연기되는 지점인데, 배우의 수준 높은 인형 조종 실력과 목소리 연기가 인형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또 반도네온 연주와 프로젝터를 통한 배경 구현, 라이브캠을 통한 송출, 단으로 나뉜 무대를 통해 집, 법원, 공장, 거리의 공간들을 효과적으로 구현해낸 지점 그리고 북한 소설에 남겨져 있는 아름다운 언어를 살려주는 해설이 어우러져 125분의 러닝타임 동안 지루할 틈이 없었다.
“부부의 갈등을 치유하고 화해시키려는 판사의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듯 보이기도 한다. 판사의 모습이 간섭, 꼰대, 오지랖으로 다가오는 건 왜 그럴까? 무관심과 냉소가 벽을 쌓고 있는 건 아닐까?” - 이해성 연출가의 글 -
작품은 예술단 성악배우 채순희가 남편 리석춘과 이혼하기 위해 판사 정진우를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정진우는 그들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의 집과 직장을 수차례 방문하고 그들의 일곱 살 난 딸 리호남을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을 만나 그들 부부를 알아가며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그러면서 자신의 결혼생활과 가정을 돌아보게 한다.
연극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 북한에서는 이혼은 단순히 한 가정의 문제를 넘어 국가 공동체를 흔들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인민재판소의 판사인 진우가 그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은 어찌 보면 직업 정신이 투철한 판사의 의무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잘 알지 못하며 ‘고독사’라는 단어를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되는 우리 사회에서 자신에게 이혼을 의뢰한 부부의 가정을 지켜주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진우의 모습은 대한민국의 관객들에게는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진우의 노력 덕에 지켜지는 가정과 그 과정에서 진우의 가정 또한 더욱 공고해지게 되면서 두 공동체가 더욱 단단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작은 공동체의 결속력은 결국 시민 사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요인이 된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는 점에서 연극의 가치가 더욱 느껴진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며 살아가지만 진정으로 ‘벗’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내 주변에 몇이나 있을지 되돌아보게 된다.
공연이 끝난 후 연출가와의 대화가 진행되었고, 정권이 교체되고 북한과의 교류가 줄어들면서 작품의 리서치와 준비 과정에서도 꽤 많은 어려움과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보였다. 이처럼 단절된 소통은 결국 서로에 대한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혐오의 골을 깊게 만든다. 북한의 체제와 행보는 국제 사회의 평안과 안보의 측면에서 충분히 비난받을 여지가 있으며 올해는 이례적으로 많은 위협을 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연극에서 보여준 인물들의 모습은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60년도 더 지난 이야기이긴 하나 지금도 여전히 그들은 평범하게 연애와 결혼과 일과 삶에 대해서 고민하는 그들이 비난받거나 혐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중앙대 김누리 교수의 저서『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에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갈등의 원인 중 하나를 분단 이데올로기로부터 시작된 군 조직 특유의 폭력적 위계와 북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여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세력이라 지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들의 정치적 선동에 매료되는가? 우리는 진정으로 그들을, 그들의 삶을 알고자 하는 노력을 했었던가?
“선진국에 진입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내가 경제적으로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그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월감보다는 상실감을 느끼는 건 왜일까? - 이해성 연출가의 글 -
원작 소설과 연극이 이데올로기를 제거하려 하였다고는 하나 작품 곳곳에는 국가를 위해 기술 창안을 하고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사회주의적 색채가 남아있다. 연극은 후반부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 나뉜 두 국가 사이에서 우리는 정말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질문한다. 사회주의의 그들이 행복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들보다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처음 농노가 해방되었을 때 사람들은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몰라 오히려 주인에게 자신을 계속 써달라며 간청한 일도 있다고 한다.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자유에는 두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며 살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불행을 겪으며 살아간다. 자유주의로부터 비롯되는 치열한 경쟁주의와 능력주의, 성과주의는 우리에게 더 많은 노동시간을 강요한다. 그 속에서 정말 행복한지 우리는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최근에 본 연극 <죽음의 집>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한다. 매일 아침 만원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며 어떤 날은 야근을 하고 주말에는 그간의 피로를 없애기 위해 어영부영 주말을 허비해버린다. 이러한 삶이 정말 진정 살아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누구는 낭만적인 고민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우울증, 자살, 고독사 등등이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단어가 된 이상 우리의 삶이 그들의 삶보다 행복하다고 쉽사리 자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질문의 해답은 춘희와 석춘의 딸 봄희가 셋으로 분리되어 배우와 배역의 경계, 연극과 실제의 삶의 경계, 허구와 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나름대로 제시된다. 극 중의 퍼펫으로 등장하는 일곱 살의 호남과 함께 퍼펫을 조종하며 목소리 연기를 하는 손아진 배우는 스무 살의 호남, ‘해설’ 역을 맡은 북한이탈주민 김봄희 배우가 연기하는 현재의 호남이 한 무대에 서서 자신들이 해왔던 선택들과 앞으로의 선택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나의 행복은 나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초월적 가치인 인간의 행복을 이야기한다. 내가 속한 국가, 체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닌 스스로 느끼는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찾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내 행복을 위해서 타인의 행복도 함께 고민하는 벗. 공동체와 공동선과 공동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진정한 ‘벗’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마음 따뜻해지는 연극이었다.
글: 예술도서관 박두환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예술도서관 아카데미를 통해 수많은 예비 연극인들을 만났다.
건강한 예술 교육자가 되기 위해 공연 관람과 글쓰기, 창작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다.
연극과 공연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그렇게 얻은 삶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