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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만든 필연: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10대 소녀 로리의 북극 여행: 연극<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10대 소녀 로리의 북극 여행



‘사랑이란 삶의 눈과도 같다. 아픈 상처 위로 깊고 부드럽게 내려오는 사랑은 눈보다도 더 하얗고 순수하다.’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속 등장하는 프리드쇼프 난센의 명언은 작품의 제목이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인 이유를 이야기해준다. ‘이누이트 말로 눈을 뜻하는 단어가 수백 가지가 된다’는 유언비어로 부터 따온 제목이지만, 작은 눈송이 속에 담겨진 로리의 가족의 소중한 추억들과 아빠의 사랑, 작은 우연들이 만나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들로 인한 성장을 담고 있기도 하다. 공연을 보고 나오며 우리는 오늘 이 작품을 보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연들을 거쳐왔는지 돌아보게 되고, 앞으로의 나를 만들어나갈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다.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빠를 잃은 10대 소녀 로리가 아빠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아빠의 유골함을 들고 북극으로 떠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모노드라마이다. 작품 속에서 아빠의 유골함을 들고 북극에 도착하는 것이 로리의 여정이라면, 유언비어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제목이 된 이유를 찾아나가는 것이 관객들의 여정이다. 작가인 태티 해네시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직접 북극을 탐사하기도 했으며, 작품 속에 북극과 북극 탐험가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서 관객들은 진짜 북극에 온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김세은 연출은 연극 <눈을 뜻 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을 통해 연출로 데뷔하였다. 영국 1인극 경연 대회에서 이 작품을 보았던 것을 계기로 작품이 한국에 들어올 수 있도록 소개하였고, 직접 연출로 참여하게 되었다. 올해 3월 국내에서 초연되었으며, 10월 13일 부터 11월 6일까지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4관에서 앵콜 공연으로 다시 돌아왔다.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엠피앤컴퍼니


우연이 만들어낸 필연


이 작품은 ‘현재의 소중함’과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빠의 죽음이라는 무거운 소재에서 출발하지만 10대 소녀 로리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그렇게 무겁지 않게 흘러간다. 홀로 북극 여행 을 시작해 북극 박물관에 가고, 또래 남자아이 안드레아스를 만나 파티에 가고, 연구원 프리다를 만나고, 엄마와 함께 아빠의 유골함을 들고 헬리콥터로 북극 상공을 날기까지의 과정들은 우리에게 웃음을 주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기도 한다. 로리는 만약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엄마와 아빠가 서로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로리의 아빠가 가장 좋아했던 탐험가 프리드쇼프 난센이 탐험가가 아닌 택시 운전사였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가정을 하며 지금 이 순간이 세상을 구성하는 수많은 작은 우연들이 모여 탄생한 필연적인 결과임을 이야기한다. 로리의 이야기처럼 우리의 삶은 별거 아니라 생각하고 지나치는 작디 작은 사건들로 구성되어있다.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작고 가벼운 눈송이 같던 이야기들이 모여 거대한 빙하가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별거 아니라 생각하고 지나쳤던 작은 순간들이 우리가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중요한 순간들임을 알려준다. 로리가 북극 여행을 하며 겪는 일들을 보며 ‘과연 이 이야기가 메세제를 전달해주기는 할까?’하는 의문을 가지고 작 품을 볼 수도 있다. ‘마지막에 도착하고 나서 처음을 떠올려보면, 얼마나 많은 다른 길들이 있었는지 놀라게 돼요. 얼마나 많은 작은 우연들이 모여서 지금이 됐는지 놀라울 뿐이에요.’ 라는 로리의 대사는 이 모든 의문을 해결해준다.


로리와 로리의 엄마는 아빠의 죽음, 배우자의 죽음이라는 같은 슬픔을 겪고 있지만, 각자 다른 방식으로 대처한다. 로리의 엄마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방법으로 이 슬픔을 이겨내려 하였고, 로리는 그런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빠의 유골함을 들고 북극으로 떠난다. 로리에게 북극 여행은 아빠의 꿈을 이루어주며 아빠와 함께 있는 것 처럼 느끼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슬픔을 이겨내는 진짜 방법이 아니다. 로리와 엄마가 진정으로 마주하여 대화를 하고, 슬픔을 슬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 진짜 방법이다. 로리는 혼자 북극으로 떠나지만, 북극에 도착하지 못한다. 자신을 찾아온 엄마와 진심을 이야기한 뒤 비로소 진짜 북극에 도착할 수 있게 된다. 로리와 로리의 엄마, 아빠가 북극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은 죽음으로 시작하였지만,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이야기해주며 삶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헬리콥터 여행 후 곧 집으로 돌아왔어요. 돌아오는 길은 엄청 짧게 느껴졌어요. 엄마는 다시 회사에 갈 거고, 나도 학교로 돌아가겠죠. 엄마가 집 문을 열고, 우리는 거실로 들어와요. 아무것도 안 변했는데, 전부다 변한 것도 같아 요.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그 얼음들을 항상 기억하게 되겠죠.’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엠피앤컴퍼니


모노드라마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의 매력


우리나라에서 로리를 연기한 배우는 초연, 앵콜 통틀어 유주혜, 송상은 두 배우 뿐이다. 90분 동안 오로지 한 명의 배우가 모든 역할을 소화하며 무대를 채워나가는 모노드라마이기에 두 배우의 로리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로리의 밝은 모습 뒤에 숨겨진 슬픔들이 잘 드러나는 유주혜 배우의 로리는 미래의 로리가 과거의 경험들을 토대로 쓴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의 대본을 연기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 10대 소녀의 천진난만함이 잘 드러나는 송상은 배우의 로리는 북극 여행 직후 쓴 아빠의 송덕문을 아빠의 무덤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읽어주는 느낌이 들었다. 배우의 연기 차이가 극 전체의 구성이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이 모노드라마의 또 다른 매력이다. 한 명의 배우가 자신이 연기한 배역으로 부터 에너지를 받아 연기하고, 그 에너지를 관객과 온전히 공유하며 진행되는 모도드라마는 2인 이상이 출연하는 일반적인 작품에서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여성 서사극이 꾸준히 제작되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그렇기에 다양한 작품들이 더욱 활발히 제작되고 있다. 작년과 올해 공연되었던 뮤지컬 <유진과 유진>은 창작 초연 작품이고, 여성 2인극임에도 불구하고 ‘매진과 매진’ 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흥행하였다. 올해 9월 초연된 여성 3인이 주연인 뮤지컬 <브론테> 역시 10회 이상의 공연이 매진되었으며, 표를 구하는 것이 힘들 정도로 흥행하는 중이다. <유진과 유진>의 제작사 낭만바리케이트는 <유진과 유진>의 공연을 위해 세워진 제작사라고 밝혔고, <브론테>의 제작사 네버엔딩플레이는 매진 회차마다 제공된 만 원 사례 전액을 기부하겠다 이야기했다. 이러한 제작사의 모습은 여성 인물이 주연인 공연 작품에 대한 가능성과 확신을 보여준다.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10대 소녀가 주인공인 1인극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0대 소녀 로리는 거대한 세상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이며 사회적 약자이다. 하지만 지구의 탄생부터 로리가 북극을 여행하게 되기 까지의 과정은 수많은 사건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유기적인 결과이다. 로리는 결코 작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이와 성별에 상관하지 않고 그저 목소리를 가진 한 사람으로서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이다. 2018년 영국 볼트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이후 수 많은 국가에서 공연되었고, 각기 다른 언어로 로리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로리의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것이 이 작은 이야기가 가진 커다란 힘이다. 여자 배우 홀로 세상을 바꾸는 작은 움직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작품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의의이다.




글: 예술도서관 에디터 리니


예술도서관 아카데미 3기 졸업생 리니는 지난 3년 동안 300회가 넘는 관극을 하며 예술의 힘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짧게는 90분, 길게는 약 180분 동안 무대 위에 펼쳐지는 세계가 위로가 되고, 용기와 힘을 주는 과정을 보면서 누군가에게는 그냥 흘러가는 시간일지 모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시간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작품을 보고 친구가 해줬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만약 이 작품이 흥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한 사람이라도 변화시켰다면 성공한거다. 나를 변화시켜주었기에 이 작품은 성공한 작품이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는 작품을 알리고 싶고, 더 나아가 그런 작품을 만드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한 작품이라도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창작자라 생각하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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