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인문극장 2025 LOCAL:지역
내가 어디서 태어났건 내 삶은 여기서부터야
두산인문극장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인문학적, 예술적 상상력이 만나는 자리로, 매년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그에 관한 공연, 전시, 강연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2025년의 키워드는 ‘LOCAL’로, 지역의 의미를 소속감을 느끼는 모든 장소와 공동체로 확장해 바라본다. 두산아트센터는 올해 ‘지역’이라는 주제를 다양한 시각으로 탐색하며, 우리 사회가 마주한 지역의 여러 모습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들여다보고자 한다.
연극 <생추어리 시티>는 단순한 이민자 이야기를 넘어, 현대 사회가 직면한 이민자 문제를 깊이 있게 조명하는 작품이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 마티나 마이옥의 작품으로,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공연된다. 이 작품은 미국의 '이민자 보호 도시(Sanctuary City)'를 배경으로, 미등록 이민자 청소년의 불안정한 법적 지위, 복잡한 정체성, 그리고 인간관계 속 윤리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 특히 개인의 감정과 선택을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되며, 관객으로 하여금 사회 구조의 문제를 스스로 되묻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작품은 미국 내 미등록 이민자 청소년들이 겪는 현실을 조명한다. 주인공 B와 G는 모두 이민자의 자녀로, 비시민권자 신분으로 살아간다. 미국에서 자랐지만, 시민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이들의 삶은 끊임없는 불안과 제약 속에 놓인다. <생추어리 시티>는 법적 불안정성이 인간관계는 물론 자아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감정적으로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특히 G가 시민권을 취득한 후 B에게 제안하는 결혼은 작품의 핵심적인 갈등으로, 이는 단지 체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짜 결혼’이 아닌,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기대고 배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2026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한 남성 후보는 “미등록 이민자 중 여성은 인셀(비자발적 독신주의자)과 결혼하면 추방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그의 공약은 남성 미등록 이민자는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여성 미등록 이민자는 1년 안에 각 주의 인셀 남성과 결혼할 경우 시민권을 부여하겠다는 제도다.
‘인셀(Incel)’은 ‘비자발적 독신주의자(involuntary celibate)’의 줄임말로, 연애를 원하지만 하지 못하는 남성을 가리킨다. 이들은 종종 자신이 연애하지 못하는 책임을 사회나 여성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제도는 미등록 이민 여성들이 시민권을 얻기 위해 원하지 않는 상대와의 결혼에 노출되도록 만든다.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민자들을 보호하는 정책 대신, 범죄에 가까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후보의 발언은 매우 참담하다. 만약 이 같은 제도가 실제로 도입된다면, 미등록 이민자의 주체성과 존엄성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
사회적 맥락에서 <생추어리 시티>는 미등록 이민자에 대한 사회적 제도의 문제를 지적한다. 특히 ‘생추어리 시티’라는 공간적 개념은 법과 권력의 경계에서 최소한의 인간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장소인 동시에, 그 자체로 또 다른 불안을 포함한다. 이민자 보호 정책은 임시적이며 불완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경계에 선 채 살아가야 한다. 연극 속 B와 G는 바로 그 ‘경계’ 위에서 살아간다. 미등록 이민자에게 안전하다고 말해지는 도시 안에서조차 그들은 언제든 추방당할 수 있으며, ‘시민’이라는 타이틀 하나가 두 사람 사이에 벽이 된다.
<생추어리 시티>는 또한 ‘관계’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G는 B를 돕기 위해 결혼을 제안하지만, 그 결정을 내리는 순간부터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변하기 시작한다. 이 연극은 사랑과 우정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애매함 속에서 인물들은 선택하고 후회하고, 때로는 도망친다. 이 점에서 <생추어리 시티>는 정체성의 문제뿐 아니라 윤리적 딜레마, 관계의 복잡성과 불완전성을 끊임없이 드러낸다.
작품에서 인상적이었던 지점 중 하나는 시간 전개 방식이다. <생추어리 시티>에서는 명확한 시간 순서를 따르지 않고 과거와 현재의 인물을 교차 시키며 기억과 감정의 흐름을 따라간다. 이런 전개 방식은 인물의 내면을 따라가며 감성선을 강조하는 효과를 줄 뿐 아니라 이민자라는 존재의 불완전성과 단절감을 다층적으로 나타낸다.
작품에서 연출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지즘언 바로 무대 전환의 방식이다. 보통 같은 경우 인터미션을 사용하며 1막과 2막 사이의 무대를 전환하고 분위기를 바꾼다. 하지만 연극 <생추어리 시티>에서는 1막이 끝난 사이에 무대에 직접 스테이지 매니저가 들어온다. 지붕은 도르레를 통해 내려오고 창문 살을 스테이지 매니저가 직접 연결하는 모습을 관객들 모두에게 보여준다. 그 밖에 소파, 벽에 선반, 식탁 위에 와인 세팅까지 스테이지 매니저의 손에 의해 2부의 무대는 전환된다. 허전했던 B의 집은 2부에서는 어엿한 집의 형태를 갖추며 2부가 시작된다. 또 신선했던 연출 방식은 1부에서는 오직 딱딱한 박스 형태만이 무대 중앙에 있으며 단순하고 추상화된 표현 방식을 사용한다. 단순화된 무대 오브제에서 조명이 적절히 사용된다. 또한 주로 마임으로 물건의 주고 받음을 표현한다.
하지만 2막에서는 다양한 무대 오브제가 들어오며 분위기가 완전히 전환된다. 러그, 소파와 그 위에 쿠션, 식탁 위 와인과 와인 잔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는 모습 등 매우 사실적이고 실제 소품을 사용하는 연출을 보여준다. 인물이 무엇을 가지러 무대를 떠나는 모습 등 새로운 연출 기법으로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주로 과거의 이야기를 다뤘던 1막에서는 시간 순이 뒤섞인 모습을 보여주고 2막에서 3년이 흐른 후는 G와 B의 모습도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두산아트센터 Space111극장은 블랙박스 극장으로 연극 <생추어리 시티>에서는 양방향 무대로 관객이 마주보며 앉는 관객석 배치를 사용한다. 단차가 크지 않아 관객에게 몰입감을 준다. 관객석 사이에 통로를 이용하여 배우가 등장한다. 2막에서 인물들은 무엇을 가져다 주기 위해 무대 밖으로 나갔다오는 연출이 새로웠다. 또한 배리어프리 연극으로 다양한 접근성 사항을 제공했다.
이런 연극 <생추어리 시티>는 법적 지위의 한계로 인해 기본적 권리 ,법적 보호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사람은 사람 답게 살아갈 권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B와 같이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다문화 가정의 자녀, 이주노동자, 난민, 탈북민 등 그들은 모두 법적 지위 불안, 사회적 편견,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과연 우리는 보호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제작/기획: 예술도서관 아카데미
글쓴이: 예술도서관 교보
장면을 상상하고, 인물을 움직이며, 무대에서 이야기가 살아나는 순간을 좋아한다. 책을 읽는 시간이 연출가를 꿈꾸게 했고, 지금도 그 상상력을 채워준다. 관객의 마음에 오래 남을 질문을 건네는 연극을 만들고 싶다. 그런 장면들을 하나씩 그려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