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회 서울연극제 공식 선정작
오늘도, 어김없이 우리 가정의 누군가로 일터로 떠났다. 인간의 삶 속 노동은 분리할 수 없는 행위이고,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를 노동이라 말하기도 한다. 우린 살아가기 위해 노동을 하고, 노동을 하기 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의 삶터이자 일터가 아픔과 죽음의 공간이 되어, 외딴곳 노동자들을 더욱 외진 곳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하루에 여섯 명의 노동자가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일터를 일궈내기 위해 일하지만, 일터는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거나, 특수한 경우만 보호한다. 연극 <산재일기>는 가려졌던 노동자들의 목소리이자, 앞으로의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되어 사회의 어두워 가려진 부분을 밝힌다. 이 글에서 연극 <산재일기>가 현대 사회의 산업재해 문제를 어떻게 조명하고, 관객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2025년 5월 9일에서 18일까지 아르코 예술극장에서 공연한 <산재일기>는 제46회 서울연극제 공식 선정작이다. 2021년 공연했던 <산재일기>는 다시 2025년 무대에 올라왔고, 그 사이의 산업재해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한다. ‘산업’이라는 단어도, ‘재해’라는 단어도 낯설게 느껴지는 관객들에게 두 배우는 17인을 연기하며 산업재해에 대해 관객에게 전달한다.
극이 시작하기 전, 스크린에는 두 배우가 연기할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전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녹색병원 원장부터 초등학생 유다인까지 우리가 뉴스에서 접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알아야 할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렇게 <산재일기>는 피해자와 가해자만이 아닌 더 넓은 우리 삶 속의 누군가를 조명한다. 17명이라는 여러 인물이 겪은 사건들이 나열되었기에 관객들의 머릿속에는 모두의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는다. 하지만 그중의 한 사람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관객의 기억에 남아 무대가 끝나서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기억이 남지 않을까. 관객들이 살아가면서 뉴스나 길거리의 시위자를 볼 때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세상의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을 이 연극을 통해 마음속에 세기게 된다.
<산재일기>와 같이 실제 사건의 당사자들의 말과 증언을 최대한 그대로 구성한 연극인 버바텀 연극 (Verbatim theatre)은 관객들이 현실을 직시하게 하면서도, 한 인물의 삶에 공감하게 한다. 누군가는 분노에 차 있기도, 17인에서 누군가는 해탈해하기도, 누군가는 자신과 전혀 무관하다는 듯이 말한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전하면서 실제성을 높이면서도, 의자와 배우들의 움직임으로 추상적인 이미지도 표현한다. 버바텀연극과 다큐멘터리 연극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산재일기>는 연극이 사실적인 모습도 묘사할 수 있으며, 연극이란 언어로도 뉴스를 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우리는 많은 산업재해와 관련된 뉴스를 봤으면서도 산업재해는 오래전의 이야기라며 무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끔 뉴스에서 관련된 일을 보더라도 극히 소수의 일이라며 치우치기도 한다. 그러나 전태일 열사나 원광레이온 등 몇십 년 전의 산업재해도 있지만, SPC나 삼성처럼 산업재해는 여전히 한국 사회의 문제 한 부분으로 남아있다. 남의 일, 오래전의 있던 일로 치우쳐진 일터에서의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산재일기>는 이야기하고 있다.
스크린과 의자 두 배우가 채운 무대
무대에는 아주 기본적인 디자인의 나무 의자들과 거대한 스크린만이 자리 잡고 있다. 남은 공간들은 배우들의 움직임과 의자들의 이동만으로 채워진다. 앞서 말했듯이 스크린에는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는 사람들의 이름들이 적혀있다. 배우들이 등장하고 연극이 시작되면 스크린에는 두 숫자가 띄워진다. 2,080/122,713 이란 숫자는 2021년도 산업재해 사망자 수와 재해자 수이다. 어떠한 부연적인 연출 없는 숫자와 설명은 반박할 수 없는 통계로 관객들이 사실을 직시하게 한다. 또한, 앞으로 시작될 이야기가 사실만을 말할 것을 보여준다. 이후 스크린은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의 이름을 보여준다.
배우들의 대사나 부가적인 정보 텍스트가 송출되기도 한다. 이때, 부가적인 정보 텍스트는 관객에게 혼란을 주기도 한다. 배우가 말하는 대사와 텍스트의 정보를 동시에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스크린은 단순히 텍스트 그 이상을 송출한다. 한 변호사가 직접 연극에 들어온다는 연출과 함께 의자와, 스크린은 새로운 방향으로 연출된다. 배우가 연기하는 무대 속에 들어온 변호사는 관객들에게 한 게임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의자를 이동시킨다. 법적으로 산업재해란 무엇이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떤 법조건이 있는지, 처벌은 어떤 처벌이 있는지를 ‘의자 이동 게임’으로 설명한다. 그 도중 스크린에는 의자들의 이동하는 방향이 화살표로 표시가 되며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이처럼 의자와 스크린은 다양한 모습으로 연출된다. 의자와 스크린은 관객들이 산업재해에 대한 이해를 도우며 대사에서 얻을 수 없는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오직 2명의 배우가 17명을 연기하는 1인다역의 이 연극은 기존 1인 다역의 연극과 차이가 있다. 서사가 아닌 실제 사실, 말, 뉴스를 바탕으로 구성된 대사는 정보성이 강하다. 다역을 연기하더라도 인물 간 서사의 유기성이 있는 다른 연극과는 다르게 <산재일기>의 17인은 산업재해와 관련되었다는 사실 외에는 연결고리가 없다. 각자의 삶이 있는 것이다. 배우들이자 화자는 그 17인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하면서 움직임으로 연결한다. 배우들의 움직임은 그들이 말하는 내용과는 다르게 서사적이고 추상적이다. 웃으면서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내용임에도 동작은 내재된 슬픔이나 아픔을 보여준다. 배우들은 100분 이상 계속해서 움직이고 말하며 노동자들의 숨겨지거나 잊혀지거나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작품의 유일한 오브제인 의자는 그런 배우들의 움직임을 돕고, 배우들의 대사에 표현력을 더한다. 2줄로 일렬로 세워진 의자들은 계속해서 이동하다 극의 후반부, 쌓고 쌓여져 탑이 된다. 의자로 만들어진 탑은 무대가 끝난 뒤에도 해체되지 않는다. 탑은 노동자들이 일궈낸 사회처럼 보인다.
연극을 통해 연출가와 작가, 무대 너머의 사람들이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파악하는 것은 연극을 공부하기 좋은 관람 태도 중 하나이다. <산재일기>를 관람할 때도 연극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려 노력했다. 산업재해에 대해 어떤 관객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지 파악하려 해 봤지만, 조금 모호한 부분이 있었다. <산재일기>에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법적인 용어들이 계속해서 언급된다. 평소에 산업이나 법률적인 부분에 관심이나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전문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는 점에서 <산재일기>는 사회고발적인 모습이 두드러진다. 이미 산업재해에 대해 약간의 관심이나 지식이 있는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며, 사회의 더욱 어두운 부분을 조명하여 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산업재해에 대한 변호사의 설명이 있는 것처럼 교육적이고, 정보 전달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관객들이 산업재해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산업재해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렇게 <산재일기>는 사회고발적인 면과 정보 전달적인 측면이 상충한다. 이런 연극은 관객들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움을 주고, 피로감을 준다.
하지만, 극장을 나서고 복기해 보았을 때 <산재일기>가 하려고 하는 말은 분명하단 것을 알 수 있다. 복잡한 전문 단어들과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엉켜 있는 알면 알수록 어렵고 피로한 것이 사회 깊은 곳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관객이 연극에 나오는 모든 정보들을 받아들일 수 없어도, 산업재해에 대해 살아가면서 관심을 가지고 피해자들을 지지해 달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산재일기>의 메시지를 알고, 관객들은 자신이 극이 전달한 메시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올해 5월 말, SPC에서 일어난 근로자 사망사건이 일어났고, 같은 회사에서 다시 일어난 산업재해이기에 더욱 주목받았다. 우리는 이제 산업재해에 대해 현실을 직시했고, 나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 2025년 1월 24일 씨리얼 채널에 한 영상이 올라왔다. ‘빠른 배송 없이 살 수 있다? 없다?’라는 제목의 영상은 주 7일 배송이 필요 없는 소비자 모임에 대해 다루고 있다. 촛불집회에 들고 온 깃발에 적힌 것처럼 영상의 사람들은 주 7일 배송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산재일기>가 다뤘던 쿠팡 근로자처럼 배송, 운반 업무와 관련된 노동자들은 과도한 업무와 회사의 방치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CJ대한통운이 택배기사가 주 5일만 근무한다고 발표했지만, 주 7일 배송을 25년 1월부로 시작하면서 노동자들에게 과도한 업무를 부과했다. 기존의 주 1일 휴무는커녕 2주에 하루 쉬게 된 것이다. 영상 속 사람들은 나의 편의와 행복을 위해 남을 해치지 않기로 결심했고, 회사 주체가 아닌 소비자로서 노동 환경 개선을 시도했다. 이처럼 마이크를 들거나 피켓을 드는 일이 아니더라도 관객들, 관객이 아닌 이들 모두 노동자들을 위해 행동할 수 있다. <산재일기>의 무대에서 관객의 삶까지 연장시킬 수 있고, 이로써 더 나은 세상의 꿈을 명확히 할 수 있다. 모든 노동자가 집에 안전하고 행복하게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제작/기획: 예술도서관 아카데미
글쓴이: 예술도서관 바다
삶을 거친 바다를 항해하듯이 살아가고자 한다. 연극과 예술이 다양한 천 조각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실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이야기 속에 지금의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것을 좋아하며 무대 속에서 재탄생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