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극단'테아트로 라 플라스' <햄릿> 리
“자신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공간을 찾기 어려운 이들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것이 더 고귀한가?’ 햄릿 혹은 셰익스피어가 던지고 간 이 명제에, 사람들은 꼬박 노인이 될 때까지 자신의 가치를 가늠한다. 내 존재의 파장은 얼마나 넓을 것인가, 심장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울 것인가. 이 그러나 이 명제 속에도 모순점은 깃들어 있다. 바로 삶과 죽음의 가치를 논하기 전,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는 인물들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완전한 인정을 받기 어려운 이들에게 ‘존재한다’라는 것은 과연 어떤 물음인지에서 촉발된 공연은, 관객을 장애인과 비장애인, 배우와 관객과 창작진, 인정과 배제의 경계로 데려간다. 2025년 모두 예술극장의 기획 초청 작품으로 초연한 <햄릿>은 3일이라는 짧은 공연 기간에 많은 관객의 기립박수를 이끌었다. 페루 극단 ‘테아트로 라 플라사(Teatro La Plaza)의 작품으로, 총 8명의 다운증후군 배우가 무대에 올라 개인의 욕망과 좌절을 이야기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을 해체하고 그들의 방식대로 재조합한 해당 공연은 여러 햄릿을 관객에게 내보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설명하기에 관객들은 무대 위의 배우가 햄릿처럼 보일 수도, 그들의 모습 그대로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줄거리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햄릿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머지않아 성사되는 어머니와 삼촌의 결혼에 충격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아버지의 유령이 나타나 햄릿에게 자기 죽음은 삼촌이자 현재 왕인 클로디어스의 계략이었으며, 절대 우연과 사고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 혼령이 정말 아버지였는지, 악마였는지 확신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햄릿은 사실을 파헤치기로 한다. 진실을 확인하고자 햄릿은 미친 척 행동하며 약혼자 오필리아에게도 상처를 입히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며 생활한다. 그러던 중, 현재 어머니와 삼촌의 관계가 매우 비슷한 연극을 발견하게 되고, 해당 연극을 통해 클로디어스의 죄책감을 끌어내 진실을 확인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그의 행동은 주변 사람들을 상처 입히고, 오해와 복수 속에서 결국 햄릿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순간, 햄릿은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길 바라며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받아들인다.
연극의 제목이자 덴마크 왕자의 비극을 담은 이야기 <햄릿>은, 적어도 이 공연에서만큼은 우리가 알고 있던 단순한 햄릿이 아니다. 배우들은 끊임없이 누군가의 ‘오필리아‘가 되어 햄릿에게 버림받는다. 이 맥락에서의 햄릿 역시 덴마크 왕자로서 단순한 ‘햄릿’이 아니다. <햄릿>이 극장 위에 올라가는 순간, 햄릿은 정의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부 조화롭게 여기는 세상에, 그들을 바라보며 교훈 점을 얻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인간관계에서 납작 엎드려 업신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평생의 흉터로 남아버린 후회를 부모님이 얻었다고 생각하는 나 스스로에게.
공연은 희곡 <햄릿>의 이야기와 배우들의 이야기를 결합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비장애인 배우 없이 장애인 배우로만 이루어진 공연이기에 공연 초반에 ‘때로는 우리가 느릴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관객에게 전한다. 공연의 매끄러운 진행과 원활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머시브(Immersive)와 서사극적 요소를 사용해 관객과 소통한다. 몇의 배우가 무대를 끌어 나갈 동안, 나머지 배우는 객석에 앉아 관객이자 창작진이 되기도 하고 조력자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통해 하나의 ‘연대감’을 얻을 수 있다. 객석에 앉은 배우들이 보내는 야유를 통해 주먹을 내리기도 하고, 조금씩 들려오는 박수 소리로 인해 금시에 객석은 환호성으로 가득 찬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반응을 살피고, 흐름을 촘촘하게 따라가며 상호작용을 통해 공연은 진행된다. 어쩌면 이것이 공연에서 외치고 싶은 가장 큰 목소리일 것으로 생각했다. 상대를 인식하는 것이 아닌, 사회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 존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닌, 존재를 수용하는 것. 색안경을 끼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안경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태도.
배우들은 자신의 생애를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장애인으로서 고충과 함께 한 사람의 인생을 무대 위에 전달한다. 그러니까,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대사와 함께 자신이 ‘진정한 햄릿’이 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했다. 배우들은 사회가 제시한 완벽한 햄릿의 틀에 끼워 맞추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조각하며 가장 이상적인, 사회가 제시한 햄릿이 되려 노력한다. 그러던 중 하나의 목소리에 부딪히게 된다. “그게 정말 네가 원하는 햄릿이야?”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삶을 살 것인가, 오롯이 자신으로서 존재할 것인가. 이때부터 동료의 목소리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더 이상 ‘완벽한 햄릿’을 연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면 떨리는 대로, 조명에 눈이 부시다면 부신 대로, 앉고 싶다면 앉은 대로, 나만의 햄릿을 찾아간다.
이 공연의 핵심은 극중극이다. 희곡에서도 햄릿은 왕의 죄를 포착하기 위해 극중극을 진행한다. 이 기회를 통해 심연 속의 마음을 찾아낸다. 배우들은 네 명의 배우가 더 필요하다며 관객에게 배우가 되어줄 사람을 모집한다. 실제로 나는 네 명 중 한 명의 배우가 되었고, 아무런 자막도 보지 못한 채 10여 분의 공연을 무대 위에서 함께 진행했다. 두 명은 나무가, 나머지는 달과 클로디우스의 역할을 부여한다. 배우가 된 나는 자막이 보이지 않고 외국어를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공연의 진행 흐름을 알 수가 없었다. 공연 도중 연출가 역할의 배우는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은 듯 공연을 중단했고, 모두 모여 회의를 진행한다. 회의가 끝난 후 공연이 재개되자 나무에게는 폴짝폴짝 뛰는 동작을, 달에게는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게 했다. 객석에서는 끊임없는 웃음소리가 들렸고, 웃는 표정을 요구하는 배우들로 인하여 덩달아 나도 웃게 되었다. 아무런 상황을 몰랐던 나는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극중극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이 웃은 이유에 관해서 물었다. 그 공연에서는 비장애인의 연기를 보고, ‘장애인처럼’, ‘다운증후군’을 겪고 있는 사람처럼 연기를 해야 했었다. 그러니까, 무대 위에서 그들은 항상 ‘배우’가 아니라 ‘장애인처럼 보이는 배우’를 연기해왔던 것이다.
“저들은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지 않잖아!” 이것이 바로 이 공연이 하고 싶은 메시지이자 이 수많은 장애인 관객 속에서 비장애인 관객을 데려간 이유이다. 장애가 있는 배우는 장애를 드러내 완전한 장애인의 모습으로서 무대에 올라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비장애인과 같이 장애를 완전히 숨기기를 요구받는다. 사회는 그들을 ‘배우’로서 대우하지 않는다. 나를 드러내지 못하고, 숨겨버리고 가려버리거나 남들과 동화되어야 하는 현실을 극중극의 형태를 통해 관객들에게 다가간다. 아직 사회는 그들을 그 자체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기에, 무의식에 외면했던 배제를 들켜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는 해당 장면을 보며 웃음에 매료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은 이유이다. 햄릿이 클로디어스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서 연극을 진행했던 것처럼, 무대 위의 배우들도 극중극을 통해서 쓴웃음을 띄고 있는 관객의 표정을 살피었고, 우리는 ‘자신’이라는 덫에 걸리게 된다.
중간에 배우들은 이곳에 가해자가 있다고 말한다. 이 공연에서 ‘가해자’란 장애인을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며 마음대로 부리는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선두로 다양한 사람들을 아울러 지칭하는 말이다. 처음 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무척이나 의아했다.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 가해자가 과연 나타날까?’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뜻밖의 장소에서 가해자를 만나볼 수 있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찾던 가해자는 내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의도하지 않은 것부터, 과한 배려와 동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 같은 동료이자 인간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인식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내가 가해자라는 이유가 될 수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가해자를 찾던 내게도 무의식에 잠자코 스며들었던 가해의 성격이 나타났다. 그러고는 모두가 나와 같이 생각했던, 조금은 어수선하고 상대를 의식하기 바빴던 객석이 잠잠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모두 자신의 보습에 비친 가해자를 찾았다. 물리적 충격과 정신적 충격을 행하는 행위만이 상처를 가하는 것이 아니구나. 잘못된 판단과 마음가짐 또한 가해의 일부이구나, 어쩌면 이것이 더 큰 가해가 될 수도 있겠구나. 경솔했던 과거의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공연 막바지에 다다라서, 스크린에는 ‘연극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명제 하나가 제시된다. 객석에는 너무 많은 연극인과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머물러 있었다. ‘연극’은 모두 사유하고 정의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저마다의 답 또한 제각각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나만은 연극의 미래를 확신하게 됐다. 그리곤 연극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다짐했던 과거의 나를 데려왔다. 다시 한번 연극을 믿게 했다. 이유는 모든 게 될 수 있었다. 무대 위의 반짝이는 배우들의 눈이 너무 아름다워서. 아래에서 내려다본 객석의 모습이 너무 황홀해서. 연극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얻어서. 어쩌면 의미 없는, 허무한 도전일 수 있다. 달콤한 거짓말로 꾀해 연극에 꿈을 품게 되는 계략일 수도 있다. 당장 바뀌지 않는 가망 없어 보이는 세상일지라도, 오늘 만난 무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기에 연극에 한 번 더 속아 넘어가게 했다. 단잠에 들어 어렴풋한 꿈을 꾼 것처럼 무대에서 피어오른 95분의 시간이, 그 속에 숨어든 진심이 오롯이 관객에게 전달된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꿈을 바라보는 게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일이었나. ‘사느냐 죽느냐?’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출현하길 바라면서. 더 이상 ‘다운증후군’과 같은 장애가 부담을 느끼고, 배제되는 대상이 아닌 다른 이들과 같이 포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 나타나길 바라면서.
고전을 차용해 사회에 의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 나에게는 물론 여러 사람들에게 매우 드물고 값진 경험이었다. 과거는 미래를 비추는 손전등이라는 말이 있듯, 연극 또한 우리의 삶을 대변한다. 과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금 내 현위치가 어디인지. 머지않은 미래를 바라보며 어떤 목표를 좇아야 하는지. 걸어온 발자취를 훑고 다가올 미래를 들여다보며 <햄릿>이 정말 하고싶었던 이야기를 찾는 것이 객석에 앉은 모든 사람들의 숙제이자, 공연을 예매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제작/기획: 예술도서관 아카데미
글쓴이: 예술도서관 헬로키티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 우연히 본 뮤지컬로 공연의 무한한 가능성에 미끄러지듯 빠져들어 무대를 통해 관객에게 선물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 기여하고 싶은 사람. 작은 일상이 소중하고 그것에서 오는 꿈으로 하루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