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안트로폴리스1-프롤로그/디오니소스>리뷰
국립극단의 <안트로폴리스–프로로그/디오니소스>(연출 윤한솔)는 고전의 신화적 서사를 현재의 정치적 풍경 속으로 과감히 이식한 작품이다. 에우리피데스의 원전에서 펜테우스는 신의 질서를 부정하고, 디오니소스는 신적 광기의 힘으로 그를 파멸시킨다. 그러나 이 공연에서 윤한솔은 신화의 상징을 정치적 은유로 전환한다. 신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바카이들은 ‘팬덤정치’의 광신도들로, 이성적 판단보다 정서적 결속으로 움직인다. 그들의 춤과 구호, 디오니소스를 향한 절대적 신뢰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리더 숭배’ 현상과 맞닿아 있다. 미국의 트럼프 지지층,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추종자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나타난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집단적 충성심까지. 이 모든 것이 디오니소스의 그림자 아래 놓여 있다.
윤한솔 연출의 해석은 단순히 팬덤정치를 풍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광기의 구조’가 어떻게 사회를 지배하게 되는가를 탐구한다. 펜테우스는 합리와 통제를 앞세우지만, 결국 그 또한 권력의 도취 속에서 스스로를 신격화한다. 그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디오니소스의 신앙을 억압하지만, 그 행위가 바로 또 다른 형태의 광기임을 작품은 폭로한다. 결국 펜테우스가 키타이론 산으로 향하는 장면은 ‘권력의 오만’과 ‘광신의 집단’이 맞부딪히는 비극적 결말을 향한 행진으로 읽힌다. 흥미로운 점은 펜테우스의 복식이 파란색이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정치 문맥에서 파란색은 특정 정당의 색채로 인식되기에, 관객은 자연히 현실 정치의 이미지와 결부해 읽게 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논란이 연상되는 이 장면은 관객에게 불편한 웃음을 남긴다. 그러나 연출의 선택은 특정 정당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누구나 광기의 정치인이 될 수 있다’는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파란색이든 붉은색이든, 권력이 신념으로 위장될 때 사회는 언제든 바카이의 광란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이처럼 작품은 신화의 구조를 빌려 ‘정치적 감정의 폭주’를 드러낸다. 오늘날 SNS와 미디어는 디오니소스의 새로운 신전이다. 리더는 대중의 환호 속에서 신격화되고, 이성과 비판은 ‘배신’으로 낙인찍힌다. 윤한솔 연출은 이 전지구적 현상을 디오니소스 신화의 틀 속에 압축해 제시한다. 따라서 <안트로폴리스–프로로그/디오니소스>는 단순한 고전의 재현이 아니라, ‘21세기판 비극’의 창조이다. 그것은 디오니소스의 귀환이며, 우리가 여전히 그 신의 이름 아래 살고 있음을 선언한다.
윤한솔 연출의 <안트로폴리스–프로로그/디오니소스>는 브레히트적 연극 언어를 동시대적으로 갱신한 ‘포스트 브레히트적 실험’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무대는 완성된 환상이 아니라 노출된 제작 현장이다. 스태프가 등장인물처럼 무대를 정비하고, 조명과 카메라가 배우의 몸을 따라 움직인다. 라이브 밴드는 무대 위에서 연주하며 장면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대신, 냉소적인 리듬으로 감정의 폭주를 절단한다. 프로그램북의 영상디저이너의 글에서는 "키치한 그래픽을 사용해 단어들을 보여주며, 고대부터 이어지는 도시의 폭력성과 부조리를 희화화한다."고 쓰여있는데 이러한 영상 연출이 작품의 환기를 도왔다. 또 광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미지들은 현대의 자본주의를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정보전달과 동시에 풍자의 역할까지 겸한다. 이러한 장치는 관객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연극임’을 인식하게 하며, 감정적 동일시보다 사유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이는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추구한 ‘비판적 관객 만들기’의 현대적 계승이다.
윤한솔 연출 특유의 피와 잔혹한 이미지 또한 이성의 붕괴를 시각화한다. 붉은 조명 속에서 디오니소스와 바카이들이 퍼포먼스적 제의의 춤을 추며, 육체의 과잉이 무대 전체를 잠식한다. 그러나 이 폭력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편함과 혐오감을 일으키며, ‘숭배와 폭력의 경계’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다. 붉은색 의상은 집단적 열광의 색이며, 파란색 의상을 입은 펜테우스는 그들 속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부각된다. 붉음과 푸름의 대립은 정치적 스펙트럼의 은유를 넘어, ‘신념이 색으로 구분되는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이 상징적 대비는 특정 정당을 향한 풍자가 아니라, 색깔로 정체성을 구분짓는 전체주의적 감각 자체를 비판한다.
무대 후반부, 헤드셋을 낀 인물이 등장해 모든 비극의 소음을 차단하는 장면은 이 공연의 윤리적 중심이다. 그는 디오니소스의 환호도, 펜테우스의 비명도 듣지 않는다. 연출은 이 인물을 통해 ‘정치적 무관심’의 초상을 제시한다. 마이클 샌델의 말처럼, “정치적 과잉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정치적 무관심”이다. 디오니소스의 광기와 펜테우스의 오만은 서로를 파괴하지만, 진정한 비극은 아무것도 듣지 않는 시민에게 있다. 이 침묵의 인물은 관객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는 현실의 뉴스 앞에서 ‘끄덕이지도, 분노하지도 않는’ 우리를 상징한다. 윤한솔 연출은 브레히트적 거리두기를 통해 관객을 각성시키되, 결코 안전한 거리에서 머물게 하지 않는다. 그의 연극은 비판적 관찰과 윤리적 참여를 동시에 요구한다. 결국 <안트로폴리스–프로로그/디오니소스>는 고전의 신화를 빌려 오늘의 민주주의를 묻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그것은 신의 이야기이자, 우리 시대의 초상이다.
글: 예술도서관 박두환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예술도서관 아카데미를 통해 수많은 예비 연극인들을 만났다.
건강한 예술 교육자가 되기 위해 공연 관람과 글쓰기, 창작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다.
연극과 공연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그렇게 얻은 삶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