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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기억으로 이어지는 사랑 : 연극<납골당 드라이브>

류이향 작‧연출 <납골당 드라이브> 리뷰

극장에 들어서면 윤지영의 노래 <어제는 당신 꿈을 꿨어요>가 흐른다. 조용히 시작되는 그 선율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시간'을 미리 예고한다. <납골당 드라이브>는 사랑의 상실 이후를 이야기한다. 게이 커플과 레즈비언 커플, 각각의 연인을 잃은 두 사람이 한집에 살게 되면서 서로의 상실을 공유하고,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모색한다. 그러나 이 연극이 진정으로 탁월한 지점은 '이야기'만큼 '몸'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데 있다. 류 연출은 "무엇보다 사랑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뒀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사랑의 감각이 배우들의 말과 몸을 통해 보여진다.


무대는 소파, 행거, 거울 등으로 구성된 현실적 거실이지만, 동시에 큐브형 구조물을 활용하여 납골당, 노래방 등 다양한 공간으로 변주된다. 또 검은색 옷을 입은 코러스-멀티롤 들이 등장하면 일상의 공간은 죽음을 기억하는 방이 되며 그들이 춤추고 노래하면 추억의 장소가 된다. 배우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공간 변화를 시각적으로 완성한다. 슬픔은 말보다 몸으로 전달된다.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듯 포옹하는 장면은 대사보다 깊이 있는 감정을 불러 낸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은 '몸의 언어'다. 사랑과 상실, 그리고 회복이 모두 신체를 통해 표현된다. 퀴어 서사에서 '몸'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다. 사회가 규정한 성별, 욕망, 관계의 틀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증명하는 장소다. 주디스 버틀러가 말한 '젠더 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처럼,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몸의 행위를 통해 "나는 존재한다"라고 끊임없이 수행한다. 그들의 춤과 움직임은 정체성의 선언이자, 사회적 규범에 대한 저항이다.


특히 트와이스, 블랙핑크 등 걸그룹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에서 보여지는 배우의 몸은 걸그룹-여성-남성의 경계를 허물고 움직이는 하나의 육체를 드러내며 한 존재를 인식하게 만든다. 후에 언급할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에서도 보아, 엄청화 등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배우들의 장면이 있는데, 이처럼 춤은 공연을 미학적으로 고양시킬 뿐만 아니라 인물의 젠더 수행성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요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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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향 작‧연출 <납골당 드라이브>, 선돌극장


<납골당 드라이브>의 류이향 연출은 이를 섬세하게 잡아낸다. 또 상실과 춤의 리듬과 템포를 적절히 활용하여 '상실'과 대비되는 '살아 있음'을 드러낸다. 몸을 보여주는 것은 관음적 노출이 아니라, 존재의 증언이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여성의 신체를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하지 않고 '시선의 주체'로 복권시켰듯, <납골당 드라이브>역시 신체를 서사적 주체로 세운다. 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퀴어의 감정을 언어 대신 전달하며, 그 자체로 수행적 언어가 된다.


이 점에서 작품은〈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와 깊이 맞닿아 있다. 두 작품 모두 동성애를 ‘비극적 서사’로 포장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의 일상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납골당 드라이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몸의 기억’을 통해 사랑의 지속성을 탐구한다. <납골당 드라이브>의 인물들은 춤을 통해 사랑을 ‘다시 수행’한다. 사랑이 끝난 뒤에도 그들의 몸은 여전히 사랑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춤은 분노의 제스처이자,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모멸의 정서다. 말로 항변하기보다, 몸으로 저항하는 방식은 퀴어 예술의 정수다. 호세 에스테반 무뇨스는 '퀴어 유토피아'개념을 통해 퀴어를 단순히 '현재의 현실 속에서 억압받는 존재'로 그리는 대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더 나은 세계를 향한 가능성의 감각'으로 이해하려 시도했다. 그는 '현재는 항상 불충분하다'라고 말하면서, 퀴어적 실천이란 현실의 억압적 구조 속에서도 순간적으로 출현하는 자유와 가능성의 장면들을 만들어내는 행위라고 보았는데, 무뇨스는 이런 순간을 '유토피아적 파편'이라고 불렀다. 이는 완전한 이상향이 아니라 '잠깐 스쳐 지나가지만 분명 존재했던 해방의 감각'이다. 이 연극에서의 춤과 몸짓들이 바로 그 파편들이다.


작품의 또 다른 주제는 ‘당사자성’에 대한 성찰이다. 현석이 쓴 소설이 “당사자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장면은, 사회가 퀴어를 바라보는 태도를 비판적으로 비춘다. 류 연출은 연출가의 대화에서 실제로 이 작품을 썼을 때 들었던 이야기라고 했다. 이 이야기가 굳이 퀴어일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작품은 퀴어를 중점으로 두고 있지만 세월호, 이태원과 같은 참사와 칼부림과 자살 등으로 죽은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애도의 정서를 품고 있다. 이러한 상실의 시대에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묻는 작품이기에 퀴어가 너무 소재화 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연출은 다시 반론했다 "그럼 안 되는 이유는 뭔가?" 이것은 극작품이나 예술이 퀴어를 다루는 범주와 방식에서 마치 자격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데, 당사자성은 결국 올바름과 연결된다고 본다. 젠더를 작품의 흥행의 목적이나 이슈를 위해 끌어들이는 창작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류 연출은 젠더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고민을 통해 작품을 개발해 나갔음이 작품을 통해 충분히 전달될 수 있었다.


결국 <납골당 드라이브>는 ‘사랑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몸으로 다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인물이 서로를 안은 채 잠시 멈춰 서 있을 때, 관객은 그들의 포옹이 단지 위로의 제스처가 아님을 안다. 그것은 삶으로의 복귀, 사랑의 재연습이다. 납골당이라는 죽음의 공간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는, 결국 ‘살아 있는 자들의 춤’으로 끝난다.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가 ‘이성애와 다르지 않은 사랑’을 증명했다면, 〈납골당 드라이브〉는 ‘몸의 기억으로 이어지는 사랑’을 증명한다. 두 작품 모두 퀴어 서사를 비극이 아니라 ‘삶의 형태’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 삶은 춤추는 몸속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다. <납골당 드라이브>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몸이 기억하고, 몸이 계속 춤춘다면.”



KakaoTalk_20251021_125719841.jpg 류이향 작‧연출 <납골당 드라이브>, 선돌극장





글: 예술도서관 박두환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예술도서관 아카데미를 통해 수많은 예비 연극인들을 만났다.

건강한 예술 교육자가 되기 위해 공연 관람과 글쓰기, 창작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다.

연극과 공연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그렇게 얻은 삶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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