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을 인정하는 것: 영화 <작은 아씨들>

빈틈을 인정하는 것에서 주인공인 '나'의 영화는 시작된다


뉴스를 틀면 늘 한숨부터 나옵니다. 세상엔 어쩜 이렇게 나쁜 사람도, 속상한 일들도 많은지 온통 마음을 무겁게 하는 소식들만 가득한 기분이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조차 없는 현실에 괜히 자책하거나 날선 마음으로 누군가와 다투는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도 꽤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금 덜 거창하자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내일의 따뜻한 밥과 편안한 잠자리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시작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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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책 <작은 아씨들>이 세상에 등장합니다. 네 자매 간의 사랑, 그리고 소녀들의 성장을 그린 따뜻한 내용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죠. 그리고 수 차례에 걸친 영화화 끝에 가장 최근인 2019년, <작은 아씨들>이 다시 한번 스크린으로 찾아왔습니다. 고전 소설을 현대적인 감성으로 재해석하며 네 자매의 성장보다는 각자의 삶에 초점을 맞춘 점에서 여러 시사점을 남겨주었죠.



함께 자라고, 부러워하고, 또 질투하며 보내던 유년 시절의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랬죠.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기보다는 쉼없이 찬란하고 따뜻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된 우리는 여전히 그 위에 모래성을 지으며 살아가고 있죠. 좀처럼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반복되고 감당할 수 없는 상실과 아픔을 겪을 때 과거는 더욱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 선택을 한 이유보다는 결과가 앞서고, 효율성과 성장에만 목매는 하루하루가 익숙해질 지경에 다다를 때, 우리는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누군가는 여성 영화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가족 영화라고 부릅니다. 또 누군가는 멜로라고, 심지어는 역사 영화라고도 하죠. 그저 이 영화는 삶을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시대상이 배어있는, 가장 개인의 가장 사회적인 스토리텔링이죠. 영화는 소설에서와 달리 개인이 선택을 한 이유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모든 캐릭터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며, 고집스러운 면모만 눈에 보이는 순간이 훨씬 많죠. 하지만 스크린의 얼굴이 바뀔 때마다 나의 모습이 비치곤 합니다. 타인의 이야기라고 했을 때 이해할 수 있는 사고의 흐름이 문득 나에게 닿았을 때, 한번도 나를 거치지 않았던 생각인 것처럼 낯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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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 않은 게 당연합니다. 의무도, 호의도, 감정도 걸치지 않은 채 나 혼자만을 바라보는 것. 그것을 이해하고, 또 인정하는 것. 자신의 욕구와 그 이유에 있어 솔직히 바라보는 것. 어쩌면 평생 능숙해질 수 없는 성숙한 사고의 일부죠. 많은 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계단을 뒤따르며 사는 게 제일 속 편하니까. 그냥 그렇게 남들 다 하는 넋두리를 주고 받으며 웃어 넘기는 게 평범한 거니까요. ‘조’라는 캐릭터를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보편적인 모습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매끄럽지 않은 감정선과, 일찍이 거절했던 친구의 고백에 대한 위선적인 대답은 그녀의 삶에 있어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방향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이유가 없었던 것도, 용기가 없던 것도 아닌, 그저 하나의 선택일 뿐이라는 것이 뒤늦게야 와닿았을 때가 가장 마음이 아려온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대는 변하고 사람은 자라납니다. 그 과정에서 빈틈이 드러나는 건 그닥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겠죠. 이상적인 존재의 하이라이트 씬과 동일선 상에 두고 평가하기 위해 나만 아는 나 자신의 비하인드 신을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영화는 변한 시대에 물음표를 던지고, 성장하는 사람들에게 온점을 찍어 그들의 빈틈을 메워주고 있습니다. 평소와 달리 답답할 때, 내가 뭘 좋아하는 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 한 번만 솔직한 순간을 겪어보는 건 어떨까요. 늘 옳거나, 늘 근사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의 빈틈은 흠집이 될 수도, 나만의 각인이 될 수도 있는 거에요.




글/제작 예술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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