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경영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영화이야기
해당 글에는 영화 <벌새>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될 수 있습니다.
해방촌 뒷골목을 걷다 보면 오래된 낙서들이 심심찮게 눈에 띕니다. 날짜와 이름, 유쾌한 단어들이 함께 끄적여진 흔적. 이 글씨를 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면 그 존재가 더욱 진하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에게는 기억되지 않은 순간도,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가장 보편적인 존재를 다룬 영화 <벌새>를 본 날, 저는 14살 은희로부터 첫 성장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갖가지 이유로 숨이 턱 막히는 집을 벗어나면 더 넓은 세계가 숨을 옥죄어 옵니다. 단짝 친구도, 학교도, 남자 친구도 제 멋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첫 상실은 마음을 도려내고, 따라온 극복은 그 빈 구석에 꼼꼼히 울타리를 쳐냅니다. 새살이 차오르지도, 그렇다고 약을 바르지도 않은 채 은희가 바라보는 세상은 한꺼풀 벗겨집니다.
동물원 우리 밖으로 나온 뱀을 보는 것처럼 사람이 신기하던 은희는 노래방에서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한 살 아래 여자 후배의 볼에 입을 맞춥니다. 상대보다 날 것 그대로의 마음에 솔직하게 답한 결과는, 여름 방학이 지나자 변해버린 후배의 태도뿐이었습니다. 노래방의 반주가 먹먹하게 눌렸을 때, 은희의 얼굴은 어린 시절, 모두의 그것이었습니다. 뜨거웠고, 간절했고, 소중했기에 모든 것이 섞여있는 표정 안에서 94년의 열 네 살의 감정을 마음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선명한 기억 속의 가장 어린 시절, 두 자리의 나이가 익숙해질 무렵 우리는 나름 비슷한 모양대로 둥글게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알 수 없는 기준에 따라 베이고, 다치고 또 웃으며 각자의 모양이 되어갑니다. 그 하나의 스침들이 의미 없는 채로 흘러간 흔적이 곧 오늘의 우리가 아닐까, 합니다.
뜨거운 상실을 담은 여름방학이 지나가고 은희는 참 많은 변화를 겪습니다. 한 걸음 나아가고, 두 걸음 물러서는 매일 안에서 은희는 스스로에게 ‘빛이 나지 않는 삶’이라는 표식을 달면서 영화를 마무리합니다.
늘 우리는 자기보다 힘든 사람을 보며 연민하고, 더 행복한 사람을 보며 동경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중간이라도 된다는 것에 충분한 위안을 얻습니다. 이기적이고, 안쓰러우며 필사적인 사고의 흐름이죠.
인상 깊은 추억은 뇌리에 박혀 삶이라는 각자의 연극의 시놉시스가 됩니다. 하지만 그 장면들은 이처럼 여백을 남긴 가위질을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지나온 시간에는 경중이 없습니다. 나름의 무게로 각자를 건드렸을, 스쳐간 시간을 사람들의 눈앞에 꺼내어주는 것. 예술을 통해 사람을 말하고자 하는 이들이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벌새는 1초에 90번에 육박하는 날개짓으로 꿀을 찾아 날아다니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입니다. 이제 생각하면 별것 아닌 것들이 언젠가 세상의 전부였던 것처럼 느껴졌던 적이 있겠죠. 그 온기가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옆에 존재할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글/제작 예술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