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앞에서 좌절하는 인간 <오이디푸스 왕>

연극과 인문학_소포클레스 - <오이디푸스 왕>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문학 주인공 역사상 이처럼 끔찍한 운명은 없을 것이다. 이 같은 끔찍한 운명은 오이디푸스가 독점했다. 이런 비극적인 운명에 저작권이 있었다면 소포클레스는 셰익스피어와 견주어 최고의 문학계 자산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 3대 비극작가로 손꼽히는 소포클레스는 제3의 배우를 추가하면서 ‘비극의 완성자’라 불린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기존의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이야기로 주체가 옮겨가면서 현대의 인간 중심의 이야기의 뿌리가 된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동시대 관객들에게도 재미와 공감을 주며 현재도 전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공연되고 있다.


소포클레스의 대표작 <오이디푸스 왕>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문학 주인공 역사상 가장 끔찍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오이디푸스가 독점한 이런 비극적인 운명에 저작권이 있었다면 소포클레스는 셰익스피어와 견주어 최고의 문학계 자산가가 되었을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내용뿐만 아니라 극의 형식적인 면에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문법을 만들어냈는데, 대표적으로 <오이디푸스 왕>에서 보인 ‘수사극’적인 방법과 ‘극적 아이러니’이다. 수사극은 말 그대로 진실을 찾기 위해, 범인을 찾기 위해 수사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형식으로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사용되고 있다. ‘극적 아이러니’는 작품 속 주인공과 관객이 공유하고 있는 정보가 달라서 생기는 극적인 재미요소로 대표적으로 공포영화에서 관객은 침대 밑에 귀신이 있음을 인지하고 있지만 주인공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해서 계속해서 침대 밑을 보려고 하는 상황 속에서 생기는 긴장감이다.


필립 사빌리 감독 <Oedipus The King>(1967)



탐정 오이디푸스, 자신을 추적하다.




오이디푸스: 너희들에 붙어 다니는 질투심은 얼마나 끈질 깃 것이냐! 내 손에 권력을 넘겨준 이 날 내가 원치도 않았는데 나에게 넘겨준 이 권력을, 크레온은 탐내고 있구나! (중략) 이욕에는 맑고 예언에는 어두운 이 음흉하고 교활한 사기꾼 예언자를 나에게 보냈다. (…)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 자신이 라이오스 왕의 살인자라고 이야기하는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그를 불러들인 크레온을 반역자로 몰아세우고 교활한 사기꾼으로 치부하면서 본인의 죄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길거리에 시체가 나뒹굴 정도로 병든 테베의 국민들은 왕 오이디푸스에게 이 끔찍한 저주를 풀어달라고 이야기한다. 오이디푸스는 지금의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남편이자 선왕이었던 라이오스 왕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고 이 끔찍한 테베의 저주를 끝내리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수사의 끝은 그 범인이 결국 자신이었고 아내는 어머니였으며 그녀의 남편이자 선왕이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되고 눈이 있음에도 진실을 보지 못하고 끔찍한 비극에 휘말린 자신을 자책하며 스스로 눈을 찌른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을 재미있게 하는 요소는 역추적을 통해 진실이 밝혀져나가는 ‘수사극’의 구조이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의 살해를 밝히기 위해 예언자 ‘테이레시아스’, 삼촌이자 매재 ‘크레온’과 아내이자 어머니 이오카스테의 증언들로부터 본인의 과거를 추적하고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이 자신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결국 그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고 이오카스테와 라이오스 왕이 자신의 친부모가 아닐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양치기와 사자의 증언으로 일말의 기대는 산산조각 나 버린다.


이런 수사극이 주는 재미는 무엇보다 ‘발견’에 있다. 그리고 관객도 그 사시들을 함께 발견해나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오이디푸스가 이 추적을 멈추길 바라지만, 오이디푸스는 그런 관객들의 마음을 알아줄 리 없다. 결국 관객들은 계속해서 추적을 이어나가는 오이디푸스에게 ‘연민’을 느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 시학에서 말하는 비극의 정의처럼 “주인공에게 연민을 느끼고 결국 카타르시스(감정의 정화)를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어떠한 감정이 어떻게 정화된 건가요?”라고 물어본다. 그것은 각자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대부분은 “저런 끔찍한 운명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어쩌면 자신에게도 있을 끔찍한 운명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오이디푸스만큼 끔찍하지 않음을 느끼고 그 운명을 타파하고 변화시킬 수 있음에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극의 기능은 결국 비극적인 사건으로 관객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역설적이고 역동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필립 사빌리 감독 <Oeidipus The King>(1967)





“내가 죽인 게 아닐 거야” 무의식적인 자기부정




오이디푸스: 나도 들어서 알고 있지만 한 번도, 그를 본 적은 없소.



이 대사를 처음 듣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느끼지 못하였는가? 여기서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은 그를 본 적이 있었던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는 모습이다. 이 같은 오이디푸스의 모습은 이 작품을 반드시 두 번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


처음 읽고 나서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라는 사실에 충격에 빠지는 모습을 보면서 관객 역시 큰 충격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 작품을 보게 되면 이미 오이디푸스 스스로가 아버지를 죽인 범인임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음이 느껴지는 대사들에서 소포클레스의 치밀함에 충격을 받을 받는다.



오이디푸스: 라이오스 왕은 어디서 죽임을 당하셨소? 집안에서요, 들판에서요,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요?



이 대사에서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이 ‘다른 나라’에서 살해당했음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집안에서 들판으로 들판에서 다른 나라로 추측이 이동하는 것이 처음 읽었을 때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면 굳이 ‘다른 나라’라고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이디푸스: 그에게 자손이 있었다면 나의 아이들과 형제가 되었으리라 이러한 까닭으로 나는 그가 마치 나의 친아버지인 것처럼 싸울 것이며(…)



오이디푸스는 이미 라이오스 왕을 자신의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이처럼 명확하게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 왕의 살인자임을 제시하는 대사가 없다. 두 번 희곡을 읽고 나면 이 같은 충격적인 재미를 얻을 수 있다.


희곡이라는 문학 장르는 특히 더 이러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연극’의 상연을 목적으로 쓰인 희곡은 인물의 행동과 대사에 여러 가지 의미와 단서가 들어있다. N차 관람, 회전문 관객과 같은 현상들은 좋아하는 배우와 작품을 여러 번 본다는 의미를 넘어서 공연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단서들을 찾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 모든 궁금증이 해결되는 순간 앞선 장면들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햄릿>에서 모두가 죽는 비극적인 결말의 장면 이전에 죽은 오필리어의 무덤을 파고 있는 무덤지기의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죽음은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 변호사, 의사 그리고 천한 광대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초월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이 장면이 후에 클라이맥스 장면과 함께 모든 인물의 죽음을 보고 나면 그들의 죽음이 비극적이면서도 한 편으로는 모두에게 찾아올 죽음이 저들에게는 조금 더 일찍 찾아왔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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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남성이 부친을 증거하고 모친에게 품는 무의식적인 정신적 애착으로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명명한 ‘일종의 현상’이다.


하지만 정작 오이디푸스는 이러한 자신의 이름을 본떠 만든 콤플렉스를 겪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오이디푸스의 행동들은 그들이 아버지, 어머니인지 조차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신의 운명을 피하려다 일어난 비극적인 상황을 가지고 만들어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서 오이디푸스는 어떤 견해를 가질지 궁금하지만 물어볼 방도는 없다. 하지만 문학작품을 통해서 이러한 흥미로운 이론이 탄생했다는 점에서 문학과 예술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예술이란 곧 인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문학작품과 예술을 분석하는 것은 곧 인간 이면의 어떠한 심리를 연구하는 과정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여럿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의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지배당한 한가 문인 마뇽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딸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들은 어머니에 이어서 누나를 사랑한다. 어머니는 의문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알고 보니 그는 남편의 사촌동생이었다.


이러한 이야기가 꾸준히 나오고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자극적인’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과는 다른 자극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이 처럼 자극적인 소재가 또 어디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일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인간들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는 없지만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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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믿으세요?”





<오이디푸스 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날이면 빼놓지 않고 하는 질문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있다’와 ‘없다’ 반으로 나뉘고 그 비율도 거의 비슷하다. 나도 이 질문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운명이 있다고 믿고 싶다. 사람들은 누가나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과학적으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점집과 타로 가게는 망할 일이 없다.


인간들은 옛날부터 인간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그 끝에 도달해 있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운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 같다. 운명은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게 되는 개인에게 주어진 속성과 같은 개념인 것 같다.


이러한 운명은 그리스 비극 작가들에게 큰 영감이 되었고 <오이디푸스 왕>을 비롯한 희랍 비극 중 일부를 ‘운명 비극’이라고 한다.



<희랍 비극(그리스 비극)의 특징>


등장인물: 군주, 귀족

대사: 운문제

비극과 희극을 철저히 구분

3일치법을 반드시 준수

운명 비극 – 이미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비극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내용처럼 이미 자신에게 정해져 있는 비극으로 인해서 비극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운명은 실제로 존재할까?


우리는 종종 큰 일을 앞두고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경우에 ‘운명에게 맡겨야지’라고 이야기한다. 이렇듯 사람들은 은연중에 운명이라는 것의 존재를 믿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때때로 운명적인 경험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일명 ‘머피의 법칙’이라 불리는 꼭 나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현상도 우리는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개인적으로 지켜본 바로는 운명을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낙관적이다. 자신에게 어떠한 불행한 일이 찾아왔을 때 그것은‘운명’때문이며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운명을 면책적인 수단으로 쓰고 있는 듯 보이지만 또 그렇지는 않다. 자신이 충분히 노력했으며 앞으로도 노력할 것이며 다음 기회에는 더 잘 될 수 있으리라는 운명을 믿는 것이다. “나는 안 될 운명인가 봐”하는 비관적인 사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나는 화가 나서 그 마부를 때리고 마차 옆을 지나가려는데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말을 모는 끝이 뾰족한 막대기로 내 머리를 정통으로 내리쳤소, 그러나 그는 더 큰 앙갚읖을 받았소 (중략) 나는 그곳에 있던 사람을 모두 죽여버렸소.



작품 속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그에게 내려진 운명 탓인지 그의 ‘오만한’ 성격 탓인지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오이디푸스는 위 대사처럼 ‘화가 났다’는 이유만으로 삼거리에서 도적단을 모두 죽여버렸다. 이처럼 오만한 성격은 소포클레스가 의도하고 만들어낸 그의 성격임은 분명하다. 아래 코러스들의 대사를 통하여 그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코로스] stasimon2


오만은 폭군을 낳고

오만은 인간을 꼭대기로 올렸다가

가파른 파멸 속으로 추락케 하리라.

...

신이 쏘는 저주의 화살을 피하지 못하리라



오이디푸스는 코러스들의 말처럼 신이 쏘는 저주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운명대로 모든 일이 행해졌다. 그러나 앞으로 그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신탁은 나와있지 않다. 오이디푸스는 눈을 찌르고 나서 ‘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세상의 진리를 바라볼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작품이 이야기하는 주제처럼 보인다.


아무리 나에게 비극적인 운명적 시련이 찾아온다고 해도 끊임없는 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결국 자유의지와 진실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구한 운명과 맞서 싸우는 인물이 또 있다. 햄릿은 ‘숙부로부터 아버지를 잃고 사랑하는 어머니마저 숙부와 결혼하게 되는 비극’을 맞는다. 이러한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격노한 운명의 화살과 물맷돌을 마음속으로 견뎌내는 것이 더 고귀한가, 아니면 무기를 들고 곤경의 바다에 맞서 싸우는 것이 더 고귀한가” 고민한다.


햄릿은 결과적으로 운명과 맞서 싸웠으나 자신 또한 죽는다. 하지만 그가 이루고자 했던 삼촌에 대한 복수는 하게 된다. 이처럼 결과가 어찌 되었든 간에 자신에게 처해진 상황과 운명들을 감내하면서 인간으로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하나씩 달성해나가는 운명과의 공생을 의미한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은 나의 죽음으로 함께 그 생을 마친다.





함께 보면 좋은 영화 오이디푸스... 오대수 – 영화 <올드보이>
common.jpg 박찬웅 감독 영화 <올드보이>(2003)



“누구냐 넌?”이라는 명대사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김우진(유지태)이 주인공 오대수(최민식)에게 학창 시절 당했던 복수를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오대수를 15년 동안 감금한다.. 대수는 우진에게서 풀려난 후 자신을 납치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추적하게 되고. 이때 한 일식당에서 ‘미도(강혜정)’을 만나게 되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우진은 일부러 대수의 앞에 나타나고 사실은 대수가 사랑한 미도가 대수의 친딸이었음을 밝힌다. 대수는 이 사실을 미도에게 말하지 않기 위해 결국 자신의 혀를 가위로 스스로 자르게 된다.



<오이디푸스 왕>과 비교해보면 근친상간과 자신의 근친상간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완성되는 비극성과 함께 끔찍한 진실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눈이 있음에도 진실을 보지 못하는 스스로를 반성하며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와 달리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얘기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혀를 자르는 오대수 두 인물을 통해서 영화가 원작에서 차용한 부분을 알 수 있다.





<참고자료>

토머스 R. 마틴, 「고대 그리스의 역사」 가람기획

에드윈 윌슨, 「세계 연극사」 퍼스트북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박수미, 「그리스 비극에 나타난 자유의지와 저항정신: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를 중심으로」, 『강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영어교육전공 석사학위논문』, 2014





ⓒ예술도서관 에디터 박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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