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
예능 PD로 일을 하면서 짧게 핵심만 말하는 법에 대한 강박이 있다. 늘어지는 편집이나 길게 중언부언 쓴 자막을 보면 극대 노하게 된다. 채널 돌아가기 전, 짧은 시간에 사람을 웃겨야 하는 일이 우리 예능 PD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능 프로그램을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면 한 문장으로 핵심만 짚어내려고 노력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처럼. 거꾸로 그렇게 한 문장이 잘 생각나는 콘텐츠들이 잘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콘텐츠에 담긴 메시지를 단번에 알아차린다는 뜻이니까.
1박 2일 - 어딘가 모자란 사내들이 1박 2일로 여행을 떠난다
무한도전 - 많이 모자란 사내들이 매번 특별한 도전을 한다
전참시- 유명인의 옆에서 매니저의 입장으로 그의 삶을 관찰한다
미우새- 복장 터지는 노총각이 된 유명인의 삶을 엄마들이 관찰한다
영화도 마찬가지
스타워즈 - 광활한 우주에 제다이가 중심에 서서, 선과 악이 맞서 싸운다.
존윅 - 모든 것을 잃은 전직 킬러가 자신을 귀찮게(?) 구는 이들에게 복수한다.
본 아이덴티티- 기억을 잃은 전직 킬러가 자아를 찾아 나선다.
아바타 - 외계 종족에 동화된 인간의 고군분투
그렇다면 헤일 메리 프로젝트를 관람한 나의 한 문장 정리는?
지구에서 외로운 남자, 우주에서 우정을 찾다
(예고편을 넘어선, 스포 일부 포함. 영화를 볼 분 주의)
멸망을 앞둔 지구를 대표해서 우주선을 타고 십여 광년 떨어진 곳에 도착한 전직 과학자이자 현재 중학교 과학 선생님인 그레이스(라이언 고슬링)는 지구를 지키기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왕복 미션이 아닌, 편도 미션으로 성공해도 실패해도 지구로 돌아오지 못하는 미션이다.
지구에서 그의 삶은 평범하다. 혹은 평범에 못 미친다. 가족도 없고 연애하는 사람도 없다. 과거에 도발적인 논문도 낼만큼 도전적인 과학자였지만 이제는 중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며 소박한 삶에 적응하며 산다. (만족이라는 단어는 안 맞는 듯)
그러나 가슴 한편에 남아있는 과학자로서의 열정. 그것이 결국 그를 우주로 불러들였다. (자의든 타의든)
지구를 살릴 방법이 있을 수 있는 행성 앞에 도착한 그레이스. 함께 출발한 동료 2명은 이미 죽었고, 광활한 우주에서 1인 3역으로 모든 걸 해내야 한다. 망망대해 우주에서 막막한 그때!
외계인과 조우한다. 어쩌면 그 외계인 입장에선 그레이스가 외계인일 수도.
그렇다 두 외계인이 마주한다.
예고편에도 나왔지만, 이 외계인은 돌덩이들이 연결된 거 같은 거미 형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름도 Rocky가 된다. 둘이 서로의 언어를 배워가며 소통하게 되는 과정이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다.
결국 둘은 미션을 성공하고 각자의 행성을 살릴 방법을 찾아내고 헤어진다.
(당연히 과정에서 여러 우여곡절이 있음)
(결말은 강력한 스포가 되니까 더 이상 말하기는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그만하기로)
우주를 탐험하고 어려운 미션을 해결하고 심지어 외계인을 만나는 SF 영화를 내가...
지구에서 외로운 남자, 우주에서 우정을 찾다
라고 요약한 것은. 이 지점이 가장 큰 울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이 다른 SF 영화들과는 다른 감상 포인트이기도 하다.
주로 우주로 미션을 떠나는 과학자, 군인, 우주 비행사 등은 지구에 가족을 남겨두고 꼭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강력하게 설정하고 반복적으로 영상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복선을 깔곤 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레이스는 단 한 번도 가족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거나 힌트를 준 적도 없다. 지구에서 가장 외로운 남자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인간관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른 SF 영화에서는 좁은 우주선에서 다른 대원들과 마찰 또는 사람 등을 주요 플롯으로 삼는데, 이 영화에서는 깨어나자마자 나 혼자다. 다 죽었고 심지어 편도 미션이라 지구로 돌아갈 방법도 없다.
그런데 유일한 생명체. 외계인(우주에선 모두가 외계인이지만...)을 만나고 그레이스는 행복하다. 함께 미션을 수행하며 희열을 느낀다. 지구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록키의 행성도 살린다는 의무감까지 더해져 소심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미션을 성공한다.
목숨을 내던지며 서로를 돕는 과정에서 우정은 더욱 깊어진다. 그래서 그레이스가 그런 선택(결말)을 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없다.
이 영화는 지구를 살리는 대의명분보다는 한 개인의 외로움에 우정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준다. 아주 훌륭한 버디 무비이다. 아마 역대 최고의 제작비를 들인 버디 무비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레이스 본인의 성장 이야기 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면 노란색 레인코트가 주요 장면에 3번 등장한다.
1. 학교에서 수업을 끝내고 비가 와서 레인코트를 입고 돌아가려는 그레이스를 멈춰 세운 프로젝트 총괄 스트라트.
2.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항공모함에 도착한 그레이스가 벗은 레인코트를 넘겨받는 스트라트.
3. 스트라트 사무실, 미션을 못 하겠다며 집에 돌아가려고 챙겨 입고 온 레인코트.
노란 레인코트는 어린이들이 주로 입는 옷이다. 잘 알다시피 서구에서는 폭우가 아닌 이상에 비가 온다고 우비를 챙겨 입거나 우산을 쓰는 것은 다 큰 성인 남자가 할 일은 아니다.
그만큼 노란 레인코트는 그레이스의 성향과 입장 변화에 대한 표현의 도구로 잘 사용된다. 입고 있을 때는 소심하고 잔뜩 움츠린 그레이스를, 벗을 때는 도전을 시작하는 심리의 표현이다.
공교롭게 레인코트는 항상 프로젝트 총괄인 스트라트(산드라 휠러)와 함께 있을 때 등장한다. 스트라트는 동독 출신(실제로도 동독 출신)이며 무뚝뚝하고 뚝심 있는 전형적인 리더로 나온다. 폭발 사고로 팀원이 죽어도 덤덤하게 미션을 진행하고, 편도 미션이라는 사지로 대원들을 보내면서도 눈하나 깜짝 안 한다.
그러는 그녀가 딱 한 번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씬이 있는데 출발 전, 마지막 파티에서 노래를 부른 장면이다. 노래를 굉장히 잘하는데 복선으로 합창단이었다는 대사가 미리 깔려있었다. 그녀도 결국 평범한 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된 그레이스는 미소를 짓는다.
레인코트와 스트라트의 상징은 아마도 미숙한 인간과 성숙한 인간의 대비가 아닐까 싶다.
결국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콘텐츠는 화려한 기교 속에서도 찐한 인간미가 보여야 한다. 그것이 외로움이든 연약한 미숙함이든...
<왕과 함께 사는 남자>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1300만 관객을 동원했다면 이 영화는 결국 인간미가 철철 넘쳐나는 스토리가 중심이지 않을까 싶다. 곧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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