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를 '커밍아웃'하는 시대

왜 10대는 극우를 '쿨하다'고 생각하게 됐나

by 포트너스

몇 년 전만 해도 극우 성향은 숨기는 것이었다.


직장에서, 친구들 앞에서, SNS에서. '나 사실 그쪽 지지해'라는 말은 꽤 많은 것을 잃을 각오가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인스타 바이오에 태극기를 박아두고, 틱톡에서 '나 보수임'을 선언하고, X(트위터)에서 페미니즘을 공개 조롱한다. 그것도 본 계정으로.


커밍아웃의 심리

성소수자 커밍아웃 개념을 여기에 가져오는 게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구조는 비슷하다.

숨겨왔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 그로 인해 일부에게 배척당하지만,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강하게 연대받는 것. 그 연대가 주는 소속감이 배척의 고통보다 클 때, 사람은 커밍아웃을 선택한다.

지금 SNS에서 '나 극우야'를 선언하는 사람들이 정확히 그 구조 안에 있다. 욕을 먹는다. 그런데 댓글에 '나도야', '드디어 말하는 사람 나왔다', '팔로우했습니다'가 달린다. 욕보다 연대가 더 크게 느껴진다.


'소수자 서사'를 뒤집어 입다

극우 콘텐츠에서 반복되는 프레임이 있다. 우리가 탄압받고 있다.

이게 영리하다. 원래 소수자, 약자의 언어였던 '탄압', '검열', '목소리를 빼앗겼다'를 그대로 가져온다.

주류 언론이 우릴 다루지 않는다. 플랫폼이 우리 계정을 지운다. 말하면 신고당한다.

틀린 말이 아닌 경우도 있다. 실제로 계정이 정지되기도 하고, 커뮤니티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그 경험이 '우리는 탄압받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서사를 강화한다.

박해받을수록 정체성이 순수해진다는 역설.

SNS에서 극우를 선언하는 행위는 단순한 정치 표현이 아니다.

피해자 정체성의 수행이다.


알고리즘이 설계한 무대

극우 커밍아웃이 늘어난 데는 플랫폼의 구조적 역할이 있다.

X는 논쟁적인 게시물에 더 많은 노출을 준다. 틱톡은 반응이 강한 영상을 밀어준다. 유튜브는 자극적인 썸네일에 클릭이 몰린다. 이 구조에서 '나 극우야'라는 선언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장한다.

욕하는 사람도, 환호하는 사람도 모두 알고리즘에게는 똑같이 '참여'다.

선언한 사람은 수천 개의 댓글을 받는다. 팔로워가 늘어난다. 주목받는다.

극우 선언이 SNS에서 가장 효율적인 관심 획득 수단 중 하나가 됐다.

신념이 동기인지, 관심이 동기인지 본인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극우는 지금 서브컬처다

정치 이전에, 문화의 문제다.

특정 밈을 공유하고, 특정 유튜버를 보고, 특정 용어를 쓰는 것. 이게 하나의 서브컬처가 됐다.

K-pop 팬덤이 특정 언어와 행동 양식을 공유하듯, 극우도 그 내부의 문화 코드가 있다.

그 코드를 아는 것 자체가 소속의 증명이다.

그래서 SNS에서 극우를 자처하는 사람이 전부 깊은 정치 신념을 가진 건 아니다.

그 문화권의 밈이 재밌고, 그 커뮤니티가 자기를 받아주고, 그 언어가 익숙해진 것이다.

서브컬처로 입장했다가 신념으로 굳어지는 경로가 지금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다.


진 쪽이 왜 더 크게 말하는가

패배한 진영이 더 요란해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긴 쪽은 안도한다. 진 쪽은 분노한다. 분노가 콘텐츠가 된다. 안도는 콘텐츠가 되기 어렵다.

지금 SNS에서 극우가 더 많아 보이는 건 실제로 늘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훨씬 더 많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들이 알고리즘을 타고 10대의 피드로, 정치에 무관심했던 사람의 화면으로 흘러들어 간다.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문화 지형은 계속 재편되고 있다.


경제적 불안은 정치적 분노가 된다

집값, 취업, 노후.

이 세 가지가 무너지면 사람은 이성보다 감정으로 투표한다.

극우가 제공하는 건 해결책이 아니다. 적이다.

이민자, 페미니스트, 엘리트, 좌파—누군가를 탓할 대상을 주는 것. 그게 훨씬 쉽고 빠르다.

배고픈 사람에게 복잡한 구조 분석은 통하지 않는다. 단순한 이야기가 이긴다.


결국 이 시대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극우 커밍아웃이 늘어나는 건 극우 사상이 설득력을 얻어서가 아닐 수 있다.

소속감이 필요한 사람들, 주목받고 싶은 사람들, 반항하고 싶은 사람들, 억울함을 느낀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같은 깃발 아래 모이고 있는 것이다. 그 깃발의 내용보다, 그 깃발이 주는 것들—연대, 정체성, 관심, 분노의 출구—이 지금 시대가 결핍한 것들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무서운 건 극우 사상이 아니다.

그 사상이 채워주는 빈자리가 그렇게 많다는 것이다.


빈자리는 채울 수 있다

빈자리가 많다는 건, 채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극우가 제공하는 것들—소속감, 정체성, 분노의 출구—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게 인간의 진짜 필요이기 때문이다. 가짜 필요가 아니다. 문제는 그 필요를 채우는 방식이 잘못됐다는 것이지, 필요 자체가 틀린 게 아니다.

그 말은 곧, 다른 방식으로 채울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그 일을 하고 있다.

거창한 정치 운동이 아니라, 옆 사람의 억울함을 듣는 것. 분노를 조롱하지 않고 왜 그런지를 묻는 것.

알고리즘 바깥에서 실제로 만나는 것.

역사는 항상 가장 시끄러운 쪽이 이긴 것처럼 보이는 시기를 지나왔다. 그리고 매번, 그 시기는 끝났다.

지금 SNS가 요란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SNS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알고리즘이 포착하지 못하는 곳에서, 말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언제나 더 많았다.

그게 지금까지 세상이 버텨온 이유다.




작가의 이전글다음 100배 주식은 어디서 나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