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돈균, 『사물의 철학』을 읽고
다음을 읽고 사물을 떠올려 보라. ‘자연의 인간을 세속의 인간으로 수정하는 도구’, ‘사회를 얻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 ‘사회적 질서를 존중하겠다는 공인인증서’, ‘사회에 입문하기 위한 제의적 사물’. 무엇이 떠오르는가? 답은 면도기다. 『사물의 철학』 저자 함돈균이 본 면도기는 그렇다. 사물을 보는 시선이 놀랍다. 한 편의 시를 읽은 듯하다.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모든 사물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바라보면 사물의 새로움을 발견한다. 시인이란 이렇게 되는 것일까. 나는 면도기가 하는 말에 집중했다. 함돈균, 그가 들은 말과는 다르다. 조금 가벼웠다.
여자에게도 면도기는 생활필수품이다. 좋아하는 여자 손가락 마디에 새까만 털이 수북하다면, 당신은 1초의 멈칫도 없이 커플반지를 끼워 줄 수 있는가? 영화 ‘러브픽션’에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남자주인공은 여자 친구 겨드랑이 때문에 꿈에 그리던 하룻밤을 망칠 뻔 한다. 외모, 성격, 능력 모든 면에서 완벽한 그녀. 당연히 없을 거라고 생각한 그녀의 겨드랑이에 수북한 털이 있다. 당혹스러울 수밖에. 사랑하는 여자의 털에도 그렇다. 여자 몸에 난 그것은 남자를 멈칫하게 하거나 놀라게 한다. 여자에게 면도기는 사회를 얻기 위한 사물이 아니다. 민망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한, 남자를 향한 배려다.
어쩌면 여자에게 더 절박한 도구일지 모르겠다. 영화 ‘러브픽션’의 여주인공처럼 자신의 털에 당당한 여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면도를 하지 않은 남자를 보고 누군가는 깔끔하지 못하다고 한다. 누군가에겐 멋으로 보이기도 한다. 멋쟁이가 되기 위해 면도를 안 하는 여자는 없다. 옷이 짧아지는 여름에는 털과의 전쟁을 치른다. 면도기로는 부족해 피부과를 찾는다. 몸에 난 새카만 그것을 완전히 없애려고. 원래 털이 자라지 않는 여자처럼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여자는 안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피부과의 시술은 털이 자라는 속도를 늦출 뿐이다. 살아 있는 한 털과 벌이는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아, 남자들이여 아는가. 여자들의 이 소리 없는 전쟁을. 어쩌면 어릴 적 첫사랑도 매일 아침 면도기를 들고 싸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인류는 불필요한 털을 없애지 못하고 진화했단 말인가. 그러나 모든 털이 천대 받지는 않는다. 머리, 눈두덩이 위는 있어야 하는 자리다. 없으면 심거나 그려서라도 만드는 곳이다. 여성성을 방해하고 첫사랑의 이미지에 훼방을 놓는 그것을 없애려고 한다. 손과 다리, 인중에 난 털이 그렇다. 털도 차별을 받는다. 인식의 문제다. 불필요한 것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의 인식이 있을 뿐이다. 털이 필요하지 않은 게 아니다. 털이 필요 없다고 느끼는 생각이 있다.
영화 ‘러브픽션’ 여주인공은 자신의 겨드랑이 털을 보고 놀라는 남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알래스카에서는 여자들이 태어나서 한 번도 안 깎아.” 세상에. 그렇게 살기 좋은 곳이 있다니. 어쩌면 그곳에선 여자가 면도기를 가지고 있다는 게 놀라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알래스카, 그곳은 어떤 곳일까. 추운 환경이 털에 대한 인식을 만들었을까. 추운 곳에서 털은 불필요하지 않다. 그렇다. 우리 몸을 보호해 준다.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자신의 역할에 고군분투 하고 있다. 면도기로 깎아 내는 것이 잘하는 일일까. 여자는 오늘도 면도기를 든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인식이란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