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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소나 Sep 18. 2024

고백

아주 어릴 때 옆집에 살던 오빠를 좋아했다. 말이 별로 없고 다른 언니, 오빠들과는 달리 나와 잘 놀아주지도 않았지만 잘생긴 오빠였다. 목소리 크고 유쾌했던 옆집 아주머니는 늘 아들의 외모를 동네방네 칭찬하고 다녔다. 그때 ‘잘생겼다’라는 단어와 의미를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오빠를 보면 수줍어했다.


오빠와 같은 초등학교에 배정됐다. 입학식을 하던 날, 창문에 5-2라고 적혀있는 오빠의 반을 운동장에서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학교 가는 길이 익숙해지고 더 이상 엄마 손을 잡고 등하교하지 않아도 되던 때의 일이다. 같은 반 남자 친구들은 하굣길에 괜히 머리를 툭툭 건드리거나, 이상한 별명을 만들어 어린 아이다운 방식으로 말을 걸어오곤 했다. 어느 날은 아이스케키를 하고 도망쳤는데, 뒤에서 그 모습을 우연히 봤던 옆집 오빠는 내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오빠가 가서 혼내줄까?” 미처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서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의 감정은 너무도 강렬해서 이 나이가 되도록 잊지 못하고 있다. 조용하고 무뚝뚝했던 오빠가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더구나 나를 괴롭히던 남자아이들을 혼내주러 뛰어간다. 철없이 놀리기만 하던 또래남자 아이들과 대비되는 어른스러운 모습,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은은한 미소로 대답하고 바로 뛰어가던 오빠의 모습은, 내 기억에 만화책의 한 장면처럼 남아있다. 힘들 때 종종 꺼내보는 소중한 추억이다. 첫사랑 얘기할 때 이 이야기를 꺼내면 너무 어릴 때의 경험이라 무시 당하곤 하지만.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늘 오빠들을 동경했다. 또래 중에도 왠지 모르게 성숙하고 듬직하며 어른스러운 남자 친구들을 좋아했다. 나에겐 그건 절대 불변의 법칙 같은 거였다.


이제야 안다. 누군가에게 이성적으로 끌리는 감정에 ‘절대’라는 건 없다는 걸. 나는 지금 어른스럽지도 않고, 잘생긴 외모도 아닌, 흡연과 게임을 좋아하는 4살 연하의 친구를 좋아하고 있다. 그 친구에게 처음부터 끌린 건 아니었다. 그저 아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특별한 감정이 없었고, 관계의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 사람이 되겠거니 했다. 어떤 계기로 그 친구에게 미안함과 안쓰러운 감정이 들었고, 비슷한 동네로 그 친구가 이사를 오게 되면서 연락하고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서였을까. 친구 이상의 감정이 생겨버린 게.


내 감정을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친구에게 이런 감정이 들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그 친구와 연락을 하거나, 만나고 나면 왠지 모를 불편감이 있었다. 거리를 두려고 했다. 어차피 남자 사람 친구와의 관계는 그리 오래갈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멀어지려고 했다. 불편한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이미 나도 모르는 새 그 친구를 좋아하고 있었고,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럴 리 없다면서 감정을 계속 억눌렀다. 그 괴리감에서 오는 불편감이었다. 그 감정이 낯설고 두려워서 그 친구와 멀어지려 했다.


그 친구를 좋아하고 있다고 나 스스로 솔직하게 인정한다. 이유는 모른다. 언제부터였는지도 잘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뭐 사실, 이미 내 감정을 받아들이고 인정한 이상 그건 중요한 게 아니게 됐다. ‘그래서 뭐, 앞으로 어쩔 건데?’ 그 친구를 생각하면서 나에게 묻는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답을 내렸다.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로 했다. 그리고 말하겠다. 더 이상 친구로도, 아는 사람으로도 만나지 말자고. 그 친구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이미 내 쪽에서 친구의 감정이 아니니 더 이상 친구로 지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확실한 감정 정리를 위해 확실한 관계 정리가 필요하다. 요즘은 고백 공격이라는 다소 거친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던데, 그 친구 입장에서 다소 섭섭하게 느껴지긴 하겠지만 공격이라는 생각까진 하지 않을 거다. 나를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긴 해도 친구로서는 분명 좋은 감정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고백 공격은 보통 싫어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았을 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던가. 어쨌든 나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 다소 이기적인 답을 내렸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한가, 라는 질문은 늘 뜨거운 논쟁거리다. 나는 다소 애매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는. 남녀 사이에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 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지켜야 할 선도, 예의도 동성친구의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엄격하다. 예민한 나는 그런 관계에 많은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았고, 그 결과로 남사친이 많지 않다.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그저 흘러가게 두었다. 여자와 남자의 우정은 원래 그런 거라고,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 친구도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는 건 이기적인 생각인 걸까.


고백 후 그 친구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상상해 본다. 아마 많이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거다. 내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안간힘 쓰며 도망 다니는 내 모습에 오히려 자신을 싫어한다고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 더 이상 친구도 하지 말자는 제안에 섭섭한 마음이 들어 화가 날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중요한 사람이다. 그 친구를 생각하느라 소모하고 있는 감정을 알게 된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나를 지키기 위해 그 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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