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부모님이 해주신 밥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자꾸 잊히는 부모님에 대한 생각. 이 글로 조금이나마 부모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 글 곧곧에 가족의 품에서 나와 살아가면서 느끼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아빠 엄마 형 나 이렇게 네 명이다. 부모님과는 스무 살 즈음까지 함께 살았고 지금은 떨어져 형이랑 함께 살고 있다.
어렸을 땐 밥 먹는 일보다 티브이를 보는 일이 더 중요했다. 엄마가 떠먹여 주는 밥을 받아먹으며 내 눈은 티브이를 향해 있었다. 엄마는 그만 먹는다는 나를 달래 한 번이라도 더 먹기를 원하셨고 나는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먹는다며 어리광을 부렸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고 엄마는 우리 형제가 돌아오길 기다려 간식을 해주셨다. 식빵에 피망과 치즈 올려 구운 간단한 피자도 해주셨고 옥수수나 감자를 쪄 주셨고 수프를 반만 넣고 라면도 끓여주셨다. 그리고 자주 사골을 고아 한 대접씩 먹게 하셨는데 그 누릿한 냄새가 당시엔 너무 싫었지만 간절히 원하는 엄마를 보며 먹지 않을 수 없었다.
학창 시절에는 식사 때마다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앉아 밥을 먹었고 아빠의 불호령에 아침밥을 꼭 먹고서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음식을 해 먹는 것만큼이나 사 먹는 일이 자주 있었다. 분식이 유행했고 짜장면이나 치킨 피자 햄버거가 붐이었다. 엄마는 우리의 입맛을 사 먹는 음식에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 어떻게든 밥을 해서 먹이고 싶어 하셨고 나도 엄마의 밥이 맛있어서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 먹는 걸 좋아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밥에 대한 걱정을 잔뜩 떠안고 계셨다. 밥을 차리는 게 순전히 자신의 몫인 것처럼 식사에 관한 모든 일을 도맡아 하셨다. 장보는 일에서부터 음식을 해서 식구들을 먹이는 일, 식사가 끝나면 쉬지도 않으시고 바로 설거지를 하신 후에 과일을 깎는 일까지 엄마는 군소리 한번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그 일을 하셨다. 그렇게 부모님은 헌신적으로 우리를 먹여 키우셨고 우리는 그 밥을 먹고 무럭무럭 잘 자랐다.
김치는 영원한 밥의 동반자였다. 당시에는 김장철이 되면 이웃들이 모여 김치를 담가 먹었고 떨어지면 김치 한두 포기정도 얻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김치가 항상 집에 넉넉히 있었다. 그 김치로 정말 많은 요리들을 먹었다. 그중 가장 많이 먹었던 건 김치찌개였다. 김치를 볶다 물을 조금 넣고 졸이고 또 조금 넣어 졸이는 것을 서너 번 하다 보면 김치의 쓴맛이 없어지며 감칠맛이 돈다. 그때 간장, 참기름, 고춧가루로 양념한 돼지고기 삼겹살 부위를 넣고 한소끔 끓여 파를 넣어 마무리하면 된다. 맛있는 김치찌개는 냄새부터 식욕을 돋운다. 방에 있다가도 그 고소하면서도 매콤한 냄새가 풍기면 절로 배가 고파왔다.
삼겹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고기와 채소의 맛, 쌈장의 달달한 감칠맛과 파채의 매콤 상큼 쌉싸름한 맛. 쌈은 입 안에서 가장 화려한 음식이다. 고기 사고 상추 사서 밥하고 쌈장 만들고 파 채 썰어 준비하고 기름 튀니까 신문지 깔고 불판 세팅해서 가족끼리 모여 입안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를 음미하였다. 거기에 콜라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이렇게 헌신적인 부모님 곁에서 나는 꽤 많은 나이를 먹도록 보답은커녕 부모님을 웃게 해 드린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땐 왜 그렇게 잠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정말 많은 시간 잠을 잤고 일어나서도 무기력했다.
가장 빨리 할 수 있는 효도는 좋은 대학에 가는 일이다.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여 좋은 대학에 가는 일이 무엇보다 나에게 좋다는 걸 누가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도무지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밥 먹고 자는 일이 거의 전부인 채로 스무 살 초반을 살았다. 이래선 안된다는 걸 그때도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부모님은 나에게 너무나 너그러웠다. 엄마는 입맛 없어하는 나를 위해 먹고 싶어 하는 것은 뭐든 다 해 주셨다. 입맛은 희망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희망이 없으면 입맛이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님은 어떻게든 나의 입맛을 돋우어 희망을 불어넣어주고 싶어 하셨다. 실컷 자고 일어나면 엄마는 뭐가 먹고 싶냐고 항상 물어봐주셨고 아빠는 지금 많이 자면 저녁에 잠 못 자니 조금만 자라고 하시며 뭐 사다 줄 건 없는지 물어봐주셨다. 하루는 이런 부모님이 너무 가여웠다. 못난 자식 키우면서 고생하시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부모님을 위해서 라도 내가 이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나를 다잡았다. 그때 부모님이 나를 나무라면서 뭐라고 하셨더라면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좌절해버렸을 것 같다. 나 스스로도 나의 행동이 너무나 형편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부모님의 그 따뜻함이 굳어있던 나의 몸과 마음을 녹였다.
공익 생활은 갑자기 나에게 찾아왔다. 군대를 나와야 제대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원하여 군대에 들어갔는데 훈련소 신체검사에서 눈이 나빠 현역으로 복무할 수 없다고 했다. 나의 공익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공익을 하면서 정말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게 공부에 맛을 들이게 되었고 느지막이 학구열을 불태웠다. 부모님도 갑자기 안 하던 공부를 한다며 대견해하시면서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다.
어느 날, 엄마는 나에게 요리를 해볼 생각이 없냐며 요리사가 되기를 권하셨다.
고심 끝에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 조리학과로 진로를 결정하였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
부모님은 내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곁에서 나를 길러냈다. 마음을 담아 영양분을 공급해준 결과로 내가 지금 일을 하고 글도 쓸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다.
부모님의 밥은 자식을 세상에 내 보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밥을 먹여 내가 튼튼해질 수 있도록, 그 튼튼함으로 세상에 나가 뭔가를 할 수 있도록 영양분을 주신 것이다. 그런 이유로 먹지 않을 때마다 엄마는 걱정을 하셨고 아빠는 나를 채근했다.
이제 나 혼자 꿈을 향해 가야 했다.
한국에서 조리학과를 마친 후 프랑스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게 프랑스어 공부를 했고 학교에 들어가 요리와 식문화에 대해 공부했다.
한참 유학 생활을 하던 중 하루는 몸이 너무 안 좋았다. 낫겠지 하며 약도 먹고 해 보았는데 차도가 없어 누워있다가 갑자기 어렸을 적 생각이 났다.
엄마의 손길, 그리고 아무 걱정 없이 부모님의 보호 아래 살던 그 시절이 그리웠나 보다. 왈칵 눈물이 났다.
목표를 세워 꾸준히 공부했고 운동했고 너무나도 다행히 운이 따랐다. 학과 과정을 별 탈 없이 마쳤고 바로 일자리도 찾을 수 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너무 무난하게 해낸 일이었다. (적시적소에 나를 도와주신 분들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지금 나는 한국에 돌아와 호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은 김치찌개니 삼겹살이니 원하는 대로 음식을 만들 수 있다. 김치찌개에 물 대신 치킨 스탁을 넣어 더 담백하게 만들 수 도 있고 현란하게 파채도 썰 수 있다. 그래도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그리운 건 엄마에게서 느껴지는 포근함과 가끔 집에 가면 피곤하실 텐데도 잔뜩 장을 봐서 밥을 차려주는 정성이 있기에 그런 것 아닐까.
이제 지금까지 받은 영양분을 다시 돌려드릴 때이다. 의무감으로 감내한 모든 헌신들을 잘 보듬어 다시 돌려 드리려 한다. 엄마 아빠라는 존재가 자식들을 키워낸 피로감으로 물들어 버리지 않기를 이제 그 피로감이 뿌듯함으로 조금이나마 바뀔 수 있기를 바란다.
한 가지 어려운 점은 서른 살이 되면 안정적일 줄 알았고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아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를 찾을 걸로 믿었는데 아직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조금 더 분발해야겠다. 나에게도 이제 의무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