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원 Aug 11. 2024

9 NINE 나인 21

<21>

출근 후에 일을 하다가 하이볼을 만들면서 얼그레이 시럽을 쏟았다. 소매에서 얼그레이 향기가 진동을 했다. 손님이 몰아치고 난 뒤 마야의 연락이 왔다.     

- 본가에 들렀는데 도서관 같이 갈까?     

그녀는 도시에서 회사를 다니지만, 월마다 본가에 방문하기 위해서 내려온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기쁘다. 심장이 뛰었다. 답장을 보내는데 얼그레이 시럽 향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씻고 만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렇게 하면 그녀가 너무 기다릴 것이고, 잘못되면 도서관 문도 닫아서 만날 핑계를 잃는다. 포기하고 만나기로 하였다.     

- 응. 있다가 봐. 끝나고 언제든지 전화해.     

퇴근 전에 화장실에 들러 머리라던가, 베터믹스가 묻은 옷깃을 털어내고 간단하게 얼굴에 선크림을 바르며 정리했다. 볼은 이미 발개져 있었다. 진정해. 이제 와서 티 내지 마. 립스틱을 바를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두고 와서 입술을 괜히 잘근잘근 씹어보았다. 빨개지기를 바라면서. 퇴근 후에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걸자 마야가 전화를 바로 받았다.     

- 퇴근했어?

응. 어디야?

- 나 이제 너 아르바이트하는 가게 다 와가. 거기 가만히 기다려 내가 갈게.

응.

편의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조금 지치고 우울해 보였다. 당장에 더 나아질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 괜히 아까 헹궈내도 냄새가 계속 올라오는 얼그레이 시럽이 묻은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세척기의 뜨거운 열에 소매는 금방 말랐지만, 시럽에 절었다가 세제에 헹궈졌다가 열에 마른 소매는 뻣뻣하면서도 눅눅한 튀김옷 같은 느낌이었다. 양손을 뒤로 잡고는 안 보이게 최대한 있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멀리서 마야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내가 행복함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는 마야가 가만히 기다리라고 한 말을 착실히 지키려 노력했지만 몇 주 만에 주인을 만나서 발발거리는 강아지처럼 그녀에게 쫓아나갔다.     

잘 지냈어?

응. 응. 너는?

더 예뻐졌네. 눈이 반짝거려.

온몸의 피가 얼굴로 몰리는 기분이었다. ‘눈이 정말 반짝거리니? 갖고 싶다면 뽑아줄게.’ 이런 말을 하면 놀라겠지. 아냐. 나 안 이뻐.쑥스럽게 그녀와 마주친 눈을 내리깔았다. 뭐 빌리러 가?」 서로 빌릴 책들에 관하여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SNS에 언뜻 올라온 철학도서를 본 적이 있다. 나는 철학을 모른다. 관심도 없었지만 갑자기 그것이 재미있어 보이고 흥미로웠다. 어렵지만 차근차근 읽어나가고 있다. 마야는 여기서 태어났고, 노화로 죽으면 최소한 황금색 층에서 철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해 할 것이다.     

그녀는 신간 코너에서 발길을 멈추었고 나는 철학 코너로 갔다. 도서관에서 가장 첫 번째 줄에 있고 사람이 없는. 뭐가 처음인지도 모르겠고 뭐부터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구석에서부터 읽어나가기 위해서 쪼그리고 앉아 오늘은 무엇을 빌릴까 쳐다보는데 마야가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 쥔 책 제목을 유심히 보았다. ‘다음에 읽어봐야지.’ 마야는 내 눈높이에 맞춰서 같이 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았다. 세탁소 기름 냄새와 섬유유연제 향기가 섞였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끌어안고 몸을 겹치면... 망측한 상상을 하는데 그녀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눈을 크게 뜨고 '뭐 하냐'는 표정을 짓자 마야가 귓가에 속닥거렸다.     

아까부터 너 맛있는 냄새 나.

목소리와 숨이 섞인 말이 귓가를 간지럽히는데 무릎이 간지러웠다. 어디서 나는 향기야? 마야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냄새를 맡으며 고개가 내려오는데 목덜미까지 내려오자 마치 물어뜯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무의식 중에 목을 내어주었다. 마야의 코가 목을 스치는데 척추를 타고 전기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한숨이 푹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더 아래로 내리더니 내 손을 들어 올려 킁킁하고 장난스럽게 냄새를 맡았다.     

여기구나.

어린아이처럼 그녀가 웃었다. 마야를 보고 마주 웃는데 눈가가 파르르 경련이 일어났다. 악마처럼 보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기특한 어린 손님들이 왔을 때 주는 캐러멜을 빠르게 한 손으로 까서 그녀의 입안에 쏙 넣어주었다. 손가락에 마야의 입술이 스쳐서 또 기분이 이상했지만, 그녀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귀여워서 웃고 말았다. 마야와 이상한 기류가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이 마음은 나만 가지고 가기로 했다.


<악마 J의 일기>     

모든 인간은 단일한 종에 속한다. 백인, 흑인, 황인, 나누지 않는다. 우리는 퇴화 중이다. 긍정적인들은 옛 시절 백인들처럼 우월주의가 있다. 간짓대를 번쩍 들어 바닥에 탕 내리치고는 부정적인들은 긍정적인이 될 때까지 이 선을 넘지 마시오. 물들 것 같소 하고 말한다. 현생 인류는 호모사피엔스 단일종이다. 부정적인들은 부정적인들일 뿐이지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요즘은 다르다와 나쁘다를 구분 지어 사용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한다. 하지만 부정적인들은 아직도 배척당하고 있다. 부정적인이 왜 나쁘냐 물으면 "부정적이니까"라고 말한다. 부정적인들은 긍정적인의 반대가 아니다 그냥 둘의 차이는 다른 생각일 뿐이고 긍정적인 들도 부정적인 면이 있고 부정적인 들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우리는 복합적이다. 물이 반이나 남은 것과 물이 반밖에 안 남은 것은 차이가 없다. 물이 반 남은 것이다. 우리는 지옥 저 위가 좋은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정말 좋은 건지 아무도 모른다. 지옥이 그렇게 나쁘냐 하면 지금 사는 이곳이 지옥보다 나은 곳이냐 묻고 싶다. 확답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사실 도망갈 것이다.


나데즈다. 조카에게 인사를 하러 와야 할 것 같아. 많이 아파.

형부 표트르의 급작스러운 전화가 끊어졌다. 자주 아프던 아이라 걱정이 되어서 나는 병원으로 내달렸다.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장례식장으로 오라고 했다. 표트르는 이미 떠나 인사도 못하는 아나스타시아를 영안실에 두고 장례식장 도착한 내게 옷을 갈아입으라 했다. 아나스타시아를 보러 가자. 올가는 나를 끌었다. 태어나서 처음 본 수의는 너무 작고, 죽은 아이는 너무 창백해서 슬펐다. 올가는 아나스타시아의 볼에 입 맞추며 목놓아 울었다. 전후사정을 다 듣고 드미트리가 고향에서 올라왔다. 드미트리는 덤덤히 말했다.     

떨어졌다지.

표트르의 어머니는 넋을 놓았다. 평소 같으면 나를 친구의 딸처럼 여기는 그분께 안부부터 꺼냈을 텐데.     

나데즈다. 뵐 낯이 없습니다. 제가 죄인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멍하니 심부름을 하다가 지치면 장례식장 한편 구석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그것이 벌써 몇 년 전이다. 그런데도 수산나를 생각하니 불쾌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수산나는 아나스타시아의 장례식 때 바닥이 더럽다.며 내게 더러운 곳에 앉지 말라는 소리나 해댔다. 나는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 분노를 참아야 했다. 올가의 마음엔 수산나의 말이 상처로 남았다.     

다음 날, 아나스타시아의 시신을 화장하는데, 올가가 주저앉아서 무너져 내렸다.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무 뜨거울 것 같아. 아나스타시아가 너무 무서워할 것 같아. 불 꺼주면 안 되니?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정신 차리라고 했다. 마지막을 보라고 했다. 마치 저 불을 꺼뜨릴 전능한 능력이라도 있는데 그러지 않는 것 마냥 행세하면서.     

내일이면 아나스타시아의 기일이다. 올가에게 괜찮냐는 안부를 묻고. 웃을 일이 있어도 입꼬리를 내리며 하루를 애도로 보내는 그런 날. 아이가 죽으면 집안의 사람들은 일 년에 두 번을 앓는다. 아이가 세상에 나온 날과 아이가 먼저 떠난 날. 내일은 떠난 날이다. 나는 언젠가 내 창자가 끊어지리라 생각했는데 아직 끊어지지 않은 걸로 봐서는 악독한 것이 틀림없다. 올가는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닌데도 머리가 새하얗다.     

거실 청소와 정리를 하면서 레고를 줍는다. 몇 년 전 24시간 카페에서 교대 근무를 하다가 올가네서 종종 자곤 했는데, 내 머리 위로 작은 인형들이 툭, 툭, 툭 떨어져서 눈을 떠 보면 아나스타시아, 그 아이가 웃고 있었다. 이모와 놀고 싶어서. 그럼 나는 팔을 뻗어 침대 위에 있는 아나스타시아를 끌어안아 내리고 올가가 깨지 않게 이불을 덮고 동화책을 읽고. 내 사랑. 나의 작은 사랑. 너는 좋은 곳으로 갔을 게 분명하니 나는 남은 여생이라도 좋은 일들로 채워서 너를 따라가야지.     

그리고 장례가 끝나고 표트르는 아는 동생이라며 남자를 한 명 소개해주었다. 그것이 스타니스라프였다.


<악마 J의 일기>     

착한 사람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저세상에 가서도 행복을 누리리라.

자신의 선행을 돌아보면 행복하고

천국으로 들어가 더욱 행복하리라.     

인간들이 읽는 법구경 중에서.


이전 20화 9 NINE 나인 2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