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를 읽고
때때로 지독한 경멸은 강렬한 열망과 동의어다. 강민주는 소설 초반부터 수많은 요소에 ‘경멸한다’, ’혐오한다’는 표현을 아끼지 않는다. 아니 퍼붓는다.
이토록 비소를 머금은 냉소적인 주인공은 오랜만이라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기분으로 책장을 넘기다 문득 생각을 했다. 왜 이렇게 경멸과 혐오를 자주 쓰나. ‘심지어 가장 혐오한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장은 최고의 것. 즉 하나의 대상에 붙여야 하는데, 강민주가 싫어하는 것들은 너무도 많다. 가장, 가장, 그리고 가장. 그러다 문득 표지를 보았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그녀에게 금지된 것은 무엇일까.
1990년대에 발표된 이 소설은 2020년대에 읽어도 위화감이 없다는 점에서 충격이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이 지금보다 당시에 덜 파격적이었다는 점이 더 충격적이다. 문학과 비평의 열렬한 구독자였던 어머니는 재밌었고 유행한 소설이라는 말을 했지만,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준 소설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장담한다. 이 소설이 최근에 출간되었다면 분명히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도 남았다. 뉴스 단골손님이었을 것이다.
여성에게 행해지는 사회의 부조리에 냉소를 품고 있던 강민주는 학교에서 소개받은 여성 상담 센터에서 일하면서 위험한 결심을 굳힌다.
비범하고 파격적이고 발칙한 납치 사건을 자행하자. 그 대상은 부드러움을 사랑하는 여성들을 현혹시키고 운명이나 사랑에 대해 교란하고 희망을 품게 만든 죄.(강민주가 내린 죄명) 비슷한 죄목들을 잔뜩 품은 영화배우 백승하. 무결해보이는 그의 내밀하고 추잡한 먼지를 털어내어 사람들의 환상을 파괴하려는 그녀의 목표는 납치로 이어진다. 그리고 성공한다. 경찰이나 어떠한 추적도 의심도 받지 않고 백승하를 사육(강민주의 표현)하는데 성공한다. 그녀는 사회를 향한 경고의 상징으로 백승하를 선택했지만, 그 과정은 일반적인 복수극과는 형태가 다르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보이는 몇 가지 패턴이 있다.
1. 심복인 황남기는 내가 절대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다.
2. 백승하도 추잡한 면을 가졌으므로 파헤칠 것이다.
3. 나는 백승하에게 쉽게 넘어가는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
4. 외부 조건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 그들보다 우위에 있으므로.
5. 신은 나의 편이다.
주목한 이 다섯 가지 패턴은 그녀가 독특한 존재라는 특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이 소설의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암시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까? 심지어 그 안에 감정이 관여되어 있다면. 확률은 급락한다. 백승하라는 인간을 사육하여 사회에 경고하고 싶은 것이 맞나? 실은 그를 소유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있었던 것이 아닌지. 신이 아닌 인간이 그녀가 외부의 모든 조건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나?
위의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은 NO다.
이러한 사고 패턴들은 그녀를 신이라 착각하게 만들었고, 결국 파국을 불러왔다..
서술에서 드러나듯이 그녀는 젖어있는 약한 것들에, 그것이 성별에 상관없이 약하다. 자신은 몰랐지만. 그건 유년시절의 그녀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상처와 폭력으로 얼룩진 처절한 싸움이 만들어낸 역사다. 강민주는 그런 것들이 싫었고 멀리하고 싶었으면서 반대 심리로 부드러운 것을 원했을 것이다. 이는 부드러움의 대표인 백승하를 대상으로 낙점하는데 기여한다. 그런데 흥미로운지점은, 백승하도 강민주와 크로스되는 유년의 불행을 품었다는 점이다. 그는 어머니의 야반도주를 경험하며 평생 그리움을 품고 성장했다. 감금된 동안에도 그는 아내보다 어린 아들을 먼저 그리워했다. 아마 그는 아들에게 자신이 겪을 불행을 되물림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두 사람은 공통점을 가진다. 게다가 자본주의에 범벅된 대중의 소란과 동떨어져 사회의 부조리에 집중하는 시선을 공유한다. 백승하가 요구한 터키의 알마즈귀니 감독의 영화, 외젠 이오네스크의 <수업>이라는 연극. 일반적으로 소비되는 대중적이고 자본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싶어하는 두 사람의 면모가 드러난다. 사회에서 문화적 취향이, 생각의 결이 같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일만큼 어렵다. 그래서 연극이 결국 두 사람의 감정선을 크게 흔들어 놓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 이를 시사한다.
결국 사랑에 빠진 강민주는 이전의 무장한 이성과 논리를 잃어버린다.
그녀는 그가 슬픔을 겪을 상상만으로도 차가운 통증을 느낀다. 결국 황남기의 만류에도 그에게 달콤하고 위험한 행복을 전달하는데 집중한다. 위기의 앞에서도 그와의 시간에 몰두하는 선택까지 불사한다. 논리를 무장했던 강민주는 결국 사랑 앞에서 인간적인 약함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 연극을 한 후부터 그를 사랑했나?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초반에 그녀는 백승하에 대해 아주 오랜시간 신문과 자료를 모으며 스크랩을 했다고 말한다. 사실 이 정도면 광팬이다. 모든 사적인 정보와 스케줄을 알 수 있는 루트를 통해서 알아낸다. 현대판 사생이다.
이 모든 걸 차가운 논조로 난 사회실험을 하는 거다. 퉁 치고 있지만, 우리는 안다. 사실은 그녀가 강렬하게 열망하고 있음을.
그녀의 경멸하고 혐오한다는 표현을 열망한다로 바꿔서 읽어도 크게 위화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지막에 그녀는 어머니가 세상에 오염과 상처와는 동떨어진 인물처럼 깨끗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어줬을 흰옷. 그런 순백을 짓이기듯 온 몸을 하얗게 휘감는다. 그리고 무대에 오른다. 무대에서 그녀는 통제할 수 없던 감정에 의해 순백을 빨갛게 물들이며 쓰러진다. 그러나 그녀의 목표가 실패했나.
그녀가 사회에 내던진 발칙한 편지의 동조 여론이 70% 이상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을 진실로 백승하가 슬퍼하며 눈물을 흐린 점도.
그녀 스스로에게 내걸었던 금지된 욕망을 그녀는 연극을 통해서 이루었던 것이 아닐까.
별개로, 백승하라는 인물이 재미있는 건 아주 무결한 피해자로 보인다는 점이다. 적어도 초반까지는. 먼지를 털어도 나오지 않는 인물. 정말 로망을 품게 만든 죄명이 찰떡같이 어울리는 남성. 그런데 그에 대한 심정이 어디서 뒤틀리느냐. 그도 결국 남성의 사회에서 살아왔음이 드러날 때이다. 그는 분명히 부드럽고 젠틀하며 심지어 연민을 가진 피해자이다. 그러나 강민주와의 대화에서 그는 “남자들이 이렇게나 양보했는데도…” 라는 표현을 쓰거나 ‘여자들이 억압받을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모두나 사회가 그런것은 아니다’ 라는 말을 하는 지점이다.
인간은 자신이 겪지 못한, 약자가 겪는 불합리한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하다. 그래서 그를 동정하다가도 강민주의 한방에 이상한 통쾌함을 느끼는 찝찝함이 생긴다. 분명히 강민주의 행동은 사이코적이고 비상식적며 잘못되었다. 그럼에도 말이다.
강민주라는 인물을 아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녀가 던진 사회적 고발이 여전히 현실을 괴롭히고 있다. 이러면 또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는 반박이 들어오겠지만 사회라는 건 개인이 만드는 게 아니다. 결국은 모두가 담론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녀의 신문사 투고가 수많은 지지를 얻어낸 게 아닐까. 결국 그녀는 죽었지만 사회에 그녀의 외침은 커다란 사회를 꿰뚫는 파장으로 남았다.
덧붙이자면, 강민주처럼 파괴적 결심을 실행하는 인물은 현실에서 드물다.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소설 속 백승하나 황남기 같은 이상화된 남성상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이 소설은, 너무도 현실적인 ‘김인수’들만이 사회 곳곳에 산재해 있음을 알려준다. 이 작품이 여전히 소설임을 잊지 않게 만드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