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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딩 Jan 17. 2024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며

할머니를 보내는 엄마의 눈물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반신이 마비되시어 누워만 계시다 가셨다. 아빠가 장남이라 친정 근처 요양병원에 모셨었다. 친정이랑 가까이 지내므로 우리 집이랑도 아주 가까웠다. 하지만 2년이 가까운 기간 동안 병문안은 3~4번 겨우 갈까 말까 했다.


할머니에게 깊은 정은 없었다. 내게 있어 할머니는.. 나의 친할머니이기보다 엄마의 시어머니였다. 엄마를 힘들게 하는 엄마의 시가를 증오했다. 할머니도 그 일부였다. 할머니는 직접적으로 엄마에게 시집살이를 시킨 분은 아니셨다. 다만 엄마가 모진 시집살이를 당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일조하셨을 뿐.


무던하고 무심한 성격의 할머니, 한발 물러서서 보면 참 털털하고 마음 너른 우리 할머니. 할머니는 그런 성품으로 엄마에게 잔소리나 구박은 일절 않으셨다. 다만 그 무심함으로 호랑이 같은 시아버지와 지독히도 이기적인 형제들로 인해 엄마가 겪어야 했던 부조리에도 역시나 입하나 대지 않으셨다.


다정하고 인정스럽게 손녀를 품어주는 할머니는 아니셨지만 깐깐하고 고지식하게 손녀의 언행에 잔소리를 하는 성품도 아니셨다. 이래도 그럴 수도 있지, 저래도 그럴 수도 있지 하시는 분이셨다. 할머니께도 내가 그다지 소중하고 귀한 손녀는 아니었을 거다. 친손 외손 포함 10명이 넘는 손자녀를 거느린 분이었다. 난 첫째도 아니고 손자도 아니고 귀염 떠는 막내도 아녔으니.. 할머니와 나는 그냥 그런 사이였다. 명절이나 경조사 때 찾아뵈면 손 한번 잡아드리고 건강하시라 오래 사시라 인사를 전하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그런 사이.


그럼에도 할머니의 장례식에선 눈물이 많이 났다. 가까이 지내면서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죄송했다. 요양병원에서 임종을 지키는 가족도 없이 돌아가시게 한 것이 죄송했다. 혼자 얼마나 쓸쓸하셨을까.


장례식장에 모인 대부분의 친척들은 내가 아주 싫어하는 분들이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그분들이 밉지는 않았다. 그때만큼은.. 그분들은 나의 엄마를 괴롭힌 사람이기에 앞서 자신의 어머니를 잃은 사람이었으니까.


할머니를 편안하게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에, 친척들에게 궁금하지 않은 안부를 묻고 짓고 싶지 않은 웃음을 지으며 최대한 자리를 지키려 노력했다. 내가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도리였다.



장례식 내내 엄마는 자주 울었다. 특히 입관 때 엄마는 할머니의 시신을 꼭꼭 주무르며 엉엉 울었다. 엄마의 반응은 다소 의외였다. 당연히 눈물을 보일 줄은 알았지만 엄마는 정말로 "아이고, 어머니"를 부르며 목놓아 울었다.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늘 ㅇ씨 집안의 맏며느리로 시집온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실수라고 말했다. 나에게 장남에 장손인 남자와는 차 한잔도 마시지 말고 절대 마음도 주지 말라고 누누이 얘기했었다. 인정 많고 여리고 몸도 약한 엄마는 드센 가문에 맏며느리로 시집와 긴 시간 몸과 마음을 다쳐 마음의 병을 얻었다. 아직도 심장이 아파 숨을 잘 못 쉴 때가 있다. 친가에 대한 나의 원망은 물론이고 시가에 대한 엄마의 한을 다 풀자면 책 몇 권은 족히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진심으로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슬퍼했다.


"어머니.. 섭섭한 거 있으면 다 털어버리시고 좋은 기억만 갖고 가이소. 제가 행여라도 서운하게 해 드렸으면 죄송합니데이.. 뒤돌아보지 말고 부처님만 따라가이소. 살아생전 기도 많이 하셨지예, 아무 걱정 마시고 가이소."


할머니의 시신을 관에 모실 때 엄마는 끝내 크게 흐느끼며 주저앉듯 할머니의 발을 끌어안으며


"아이고 부처님 우리 어머님 잘 부탁드립니데이. 어머님 잘 가이소.. 잘 가이소. 먼 길 조심해서 가이소." 하며 우셨다.


긴 시간 원망의 대상이었을 텐데.. 엄마는 무엇이 그렇게 슬펐던 것일까.


발인이 끝나고 화장장으로 향하는 길에 엄마는 나지막이 내게 말했다.


"너희 할머니도 모진 남편 만나고 힘든 집에 시집와서 정말 고생 많이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엄마 역시도.. 죽음 앞에서는 인간사의 케케묵은 애증보다는 오랜 세월을 함께한 한 사람에 대한 인간적 연민이 앞서는 것 같았다. 할머니에 대한 원망이나 섭섭함보다 함께한 세월이 주는 회한과 할머니의 삶에 대한 연민이 엄마를 그리도 울게 했나 보다.


6.25를 거치며 가족을 잃는 아픔도 겪으시고 20살이나 많은 할아버지와 결혼해서 종갓집 맏며느리로 살며 7남매를 키웠고 자식 중 하나를 사고로 먼저 보내신 우리 할머니.


엄마를 많이도 힘들게 했던(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엄마의 힘듦을 방관했던) 할머니지만, 그네의 삶 또한 엄마의 삶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모질고 험했으리라.


"그래도 너희 할머니가 성격이 무던하고 무심하셔서 그 험한 일들을 다 겪으셔도 멀쩡하셨지. 너네 할머니이니 이렇게 무탈하게 살다 가셨지 웬만한 사람이면 못 버텼을 거다."


우리 엄마를 많이 힘들게 하신 할머니. 그래도.. 그래도 불쌍한 우리 할머니. 그럼에도 본인은 늘 "이만하면 복 받고 편하게 살았다."라고 말씀하시던 할머니.


엄마가 할머니께, '이승에서의 서운함을 다 털어버리고 가시라'라고 말했듯 나 역시도 할머니께 가졌던 좋지 않은 마음은 모두 털어버리고 할머니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하련다.


할머니 잘 가세요.

저도 좋은 기억만 남길게요.

그곳에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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