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집:갈월동 98번지집》 - 단죄할 수 없는 선택

인간을 위한다는 말의 여러 얼굴

by 어떤
작품 소개

풍수지리 좋은 땅에 '국제 해양 연구소'가 들어선다. 모두가 원하던 그 땅이 국가 소유가 되었고, 어떤 대단한 건물이 들어설까 질투와 기대섞인 마음이었다. 국제 해양 연구소는 주민들이 흉물로 치부할 정도로 기대를 저버렸고, 그 부지에 들어선 또 다른 건물인 '경동 수련원'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이름만 수련원이고 실상은 다르다는 설명에, 내 머릿속에는 '남영동 대공분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20대 초반에 가게 된 남영동 대공분실은 지금까지 잊기 힘든 기억이 되었다. 딱 한 번 가봤음에도 그 외부와 내부 모습이 생생하다. 7-80년대 정권에 반대하는 '불순분자'들이 잡혀와 고문과 취조를 당한 곳이다. 이 건물은 불순분자들을 효과적으로 고문하고 그들의 공포를 극대화하도록 치밀하게 계산되고 설계되었다.


작품 속 건축가이자 교수인 여재화는 당시 내무부 장관으로부터 경동 수련원 건축을 수주받는다. 여재화는 이미 맡고 있던 건축 의뢰도 진행중이고, 수업도 해야 해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랐다. 그렇다고 경동 수련원 건축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 건이 잘 해결되면 정교수가 될 수 있고, 신임을 얻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는 욕망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조수로서, 제자 중 가장 물렁하고 욕심이 없으면서 성실하고 실력 좋은 구본승을 택한다. 구본승의 도움은 취하고, 이 건물을 건축한 공은 자신이 받아, 토사구팽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작품은 여재화와 구본승이 경동 수련원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위한 건축'이 어떻게 다르게 해석되는지 고찰하게 한다. 또, 과연 우리가 누군가의 선택에 대해 쉽게 판단하고 평가하고 욕할 수 있을까 자문하게 만든다.


인간을 위한다는 말의 여러 얼굴

여재화는 자신의 제자 구본승으로부터 큰 충격에 휩싸인다. 물렁한 제자인줄 알았더니, 구본승이 설계한 이 건물이 너무도 무자비했기 때문이다. 여재화는 구본승에게 건축의 핵심은 결국 그 건물에서 생활하는 인간이라고 가르친다. 그 말을 듣고 구본승은 더욱더 무자비한 건축을 설계한다.


취조실이자 고문실은 복도 기준으로 양 옆에 늘어서있는데, 서로 마주보지 않고 어긋나게 만들어졌다. 다른 공간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 않으면서 고문받는 소리만 들을 수 있게 하여 공포심을 느끼도록 말이다. 또, 천고는 높게 설계되었다. 다른 곳에서 누군가가 고문받아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크고 멀리 울려퍼져야하기 때문이다.

계단은 나선형 구조이다. 눈을 가리고 들어오는 불순분자들이 이 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몇 층에 있는 것인지, 방향이 어디인지 가늠을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 계단의 폭은 60cm 정도로 매우 좁게 만들어, 공포를 느끼도록 하였다.

기 설계에서 구본승은 창문을 설계하지 않았다. 불순분자들이 창문을 깨고 탈출하면 안 되니까, 그리고 그들이 지르는 비명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이 창문을 통해 빛을 보면 '살 수 있다, 빠져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 희망이 오히려 고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이르자, 구본승은 창을 좁고 길게 만들어 하루 중 단 20분만 햇빛이 들어오게 만들었다.

햇빛을 보면 희망이 생기다가도, 고문을 당하고 빠져나갈 수 없음을 깨달으면 절망에 빠진다. 절망 속에서 하루 중 아주 잠깐 들어오는 햇빛을 보면 다시 미약하게나마 희망을 느낀다. 희망과 절망이 반복되는 지옥이다. 구본승은 하루 중 잠깐 들어오는 햇빛이 또 다른 고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창문 설계를 이와 같이 수정한 것이다.


여재화와 구본승 둘 다 건축은 그 곳을 이용하는 인간을 위해야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인간을 위한다'는 말을 다르게 해석하였다.

여재화에게 인간을 위한다는 것은, 곧 휴머니즘이다. 최소한의 인간다움, 인권은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반면 구본승에게 인간을 위한다는 것은, 오로지 이 건축물의 용도와 목적, 그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고려하는 것이다. 이 건물은 불순분자들을 취조하고 고문하는 곳이기에, 그 공간을 사용하는 불순분자들의 느껴야할 공포심을 극대화하도록 설계하였다.


단죄할 수 없는 선택

20대 초반, 내가 남영동 대공분실을 방문했을 때는 분노하며 건축가를 원망하고 욕했다.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고문하기 위해 이렇게 치밀한 계산과 설계로 무자비하고 잔인한 건물을 건축 수가 있는가. 이 건물을 건축한 그 사람은 당시 정권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한 자리 차지하려 야욕을 가진 기회주의자라고 생각했다.

이 작품을 보고 여재화도, 구본승도 욕할 수 없었다. 여재화는 욕망을 위해 이 건축 설계를 맡았으나, 건축물 대장에는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않고 구본승의 이름을 올렸다. 양심에 찔려서인지, 훗날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실제로는 구본승이 핵심 설계를 다 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혹여 여재화가 건축 의뢰를 거절했어도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맡았으리라 장담한다. 누군가는 반드시 했을 것이다.

구본승은 자신이 직접 의뢰받은 건축은 아니나, 건축가로서 최선을 다했다. 정권의 신임을 받으려고 한 것도, 한 가닥 자리잡으려고 한 것도 아니다. 그곳에서 고통받을 사람들을 염두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오로지 건축가로서 아주 치밀하게 그 건물의 용도와 목적만을 위하여 설계한 것이다.

둘 다 각자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


작품 말미에 구본승이 구매한 복권의 의미

구본승은 갈월동을 걷는다. 이제는 공인중개사로서 갖게 된 직업병으로 인해 건물과 부지가 시세로 보인다. 그리고 복권 한 장을 산다.

'복권'에는 희망이 담겨있다. 일확천금을 할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 그런데 그 희망이 너무 절실하면 매주 실패하며 겪는 아쉬움과 고통의 크기도 크다. 그럼에도 또다시 복권을 구매한다. 이게 바로 구본승이 구의 집을 설계할 때 고려한 '희망 고문'이다.

불순분자로 끌려온 이들에게 아주 약간의 빛만 줌으로써 그들은 희미한 희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희망은 곧 절망이 되고, 절망을 희망으로 버틴다. 마치 복권처럼. 희망과 절망의 악순환. 이것이 구본승이 의도한 희망 고문이다.

그리고 수십 년 뒤 구본승은 갈월동을 걸으며 한 복권 판매점에 들어가 복권 한 장을 구매한다. 한때는 희망 고문을 설계한 사람이, 이제는 본인이 희망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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