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모노》 - 진짜와 가짜 사이

경계 위에 선 사람들

by 어떤
혼모노(진짜)와 니세모노(가짜)의 경계

주인공 박수무당 문수가 장수할멈을 신령으로 모시며 살 때는 그는 혼모노였다. 장수할멈이 백이면 백 정확하게 점지를 해주니, 문수는 무당으로서 혼모노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장수할멈은 문수를 떠났다. 나이만 들고 욕심만 그득하다고, 다른 어린 무당에게 갔다. 신령을 잃은 무당인 문수가 니세모노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이 작품의 주 내용이다.


오래 숙성된 와인

주인공 문수와 문수의 오래된 손님인 정치인이 프라이빗 바에서 대화를 나눈다. 정치인이 이렇게 말한다. 나이만 들어서 이제 누가 찾아주지도 않는다고. 정치판에서 자리잡기 힘들다고. 그 얘기를 들으며 문수는 오래 숙성된 와인을 마신다. 끝맛이 좋지 않고 떫다.

작품 속에서 정치인은 나이가 들면 값어치가 없다고 하소연하지만 와인은 그렇지 않다. 보통 와인은 숙성된 기간이 길수록 가치있고 비싸다. 그렇다면 문수가 마신 오래 숙성된 와인은 혼모노일까? 문수는 와인의 끝맛이 좋지 않고 떫다고 말한다. 마시기 전까지 와인은 혼모노인 줄 알았으나, 마셔보니 니세모노인 셈이다. 혼모노와 니세모노의 경계가 모호하다.


보이차

문수의 신당 앞에 문수가 모시던 장수할멈의 새로운 몸주인 어린 무당이 들어왔다. 그 아이의 부모님은 문수에게 잘 부탁드린다며 인사를 왔다. 문수는 그들을 자신의 신당 안으로 들이며, 어느 절의 스님에게 받은 비싼 보이차를 내주었다. 그 아이의 아빠는 자신이 보이차에 대해 잘 안다며, 어떤 것이 진짜고 어떤 것이 가짜인지 구별하는 방법까지 설명한다. 그리곤 문수가 준 보이차는 진짜라고 칭찬으로 일색한다.

그러나 아이는 보이차를 맛보고는 맛 없다고 뱉어버린다. 문수는 아이가 이 비싼 걸 알아볼리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 입장에서 보이차는 니세모노다. 보이차는 혼모노일까 니세모노일까.


와인, 보이차 모두 혼모노인지 니세모노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상황(와인을 마시기 전과 후)에 따라 다르고, 누가 판단하느냐(문수, 어린 무당)에 따라 다르다. 판단하는 그 사람이 혼모노인지 니세모노인지도 모호하다. 즉, 혼모노와 니세모노를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구별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기믹 래퍼와 문수

이 작품의 결말 부분에서 나는 내가 즐겨 보는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를 떠올리게 되었다. 한때 쇼미더머니에서는 '기믹'이 화두였다. 주목받기 위해 자신만의 컨셉과 상황을 설정하여 캐릭터화한 래퍼들이 등장했다. 그런데 이 컨셉이 자신과 동화되지 않고 연기하는 것이 너무 티가 날 경우, '기믹이다, 티 난다'라고 말하며 좋지 않게 보곤 했다. 꼴보기 싫은 것도 있을테고, 과한 캐릭터 설정으로 랩에 집중이 되지 않고 몰입이 깨지기 때문도 있다. 한 심사위원인 래퍼는 자신을 '기믹 판별기'라고 하며 참가자들의 기믹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려내곤 했다.


그런데 독특한 경우가 있다. 참가자가 기믹이라는 것이 티가 나는데도, 컨셉인 것을 모두가 다 알고 있는데도, 보는 사람까지 그 캐릭터에 동화되고 설득되는 경우이다. 이 경우를 이렇게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누가봐도 기믹인데, 본인이 그 캐릭터, 그 상황에 완전히 몰입하여 자기 자신조차도 속이는 지경이 이른 것이라고. 그럼 인정이라고. 이러한 지경까지 왔다면, 더 이상 진짜와 가짜, 혼모노와 니세모노가 중요하지 않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뿐더러, 구별되지도 않는다. 이미 본인과 한 몸이 되었으니.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주인공 박수무당 문수가 모시는 신령님은 이미 자신을 떠났다. 신기가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다른 니세모노 무당들처럼 과하게 눈을 뒤집으며 연기하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신기 떨어진, 가짜로 보고 의심하는 사람들 앞에 정면으로 부딪친다. 자신이 니세모노가 된 것이 들통날 수도 있는 굿판에 당당히 등장한다.

신 들린 무당(혼모노)은 날카로운 칼로 자신의 피부를 찢어도 피가 나지 않는다. 문수는 자신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칼로 자신의 피부를 찢고 피가 흐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신이 들린 것처럼 과하게 연기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굿을 이어간다. 결국엔 장수할몸의 새로운 몸주인 어린 무당이 먼저 지쳐 떨어져나간다. 문수에게 이제 더 이상 자신이 혼모노인지 니세모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장면이다.


정체성

<쇼미더머니>의 기믹 래퍼와 <혼모노>의 문수는 비슷한 듯 다르다. 기믹 래퍼는 자신에게 정체성(기믹, 컨셉, 캐릭터)을 부여함으로서, 문수의 경우 무당으로서의 정체성(신령이 떠남)을 잃음으로서 혼모노와 니세모노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장수할멈이 떠나기 전 문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부심이 있다. 자신은 연기하거나 거짓말하는 가짜 무당이 아니고, 진짜 무당이라는 것. 애매한 점괘를 늘어놓거나 굿을 할 때 과하게 연기하는 무당을 경계한다. 그런 문수가, 장수할멈이 떠나 무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었다. 문수가 니세모노의 삶을 거부하고 다시 혼모노가 되기 위해 발악한 것일까? 그보다는 이제 더 이상 문수에게 혼모노냐 니세모노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하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만의 삶과 정체성을 만들어가려는 주체성이 강한 인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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