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s in my pencil case

10년 넘게 곁을 지켜준 낡은 필통과 그 속을 채운 작고 단단한 도구들

by 어디

물건에도 인연이 있다면, 저와 이 갈색 실리콘 필통의 인연은 꽤 질긴 편입니다. 예전 한창 캐릭터 굿즈를 좋아하던 시절에 산 ‘브라운’ 필통인데,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제 곁에서 버텨주었습니다. 특별한 사연이 있어 아끼기 시작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샀기 때문에 쓰기 시작했고, 무던한 내구성이 기특해 쓰다 보니 정이 들었을 뿐입니다. 먼지가 묻으면 흐르는 물에 슥 닦아내면 그만인 이 투박한 물건이, 어쩌면 저의 기록 생활과 가장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필통 지퍼를 열고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어 봅니다.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건 플래티넘사의 프레피 만년필입니다. 만년필이라기엔 너무나 문구스러운 투박한 디자인이지만, 저렴한 가격대에 비해 품질이 훌륭해 몇 개씩 여분을 챙겨둘 정도로 아끼는 저의 인생 펜입니다. 그 곁에는 본업인 피아노 레슨을 할 때 쓰는 빨간색 샤프와 다이어리의 대제목을 적는 피그먼트 라이너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각자의 역할이 뚜렷한 이 도구들은 제 일상의 질서를 잡아주는 든든한 아군들입니다.


필통 안쪽에는 조금 의외의 물건들도 들어있습니다. 작은 가위와 리필형 풀테이프 같은 것들이죠. 가위는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안전을 위해 가위집이 있는 모델을 골랐고, 풀테이프는 아이들이 만지다 고장이 나도 리필을 끼워가며 오래 쓰려 노력합니다. 기록 도구에 아이들의 손때가 묻고, 때로는 망가지기도 하는 그 모든 순간이 저에게는 소중한 생활의 기록입니다.


저는 한 달에 열 권 남짓의 책을 읽습니다. 책을 깨끗하게 보고 싶은 마음에 밑줄 대신 마스킹 테이프를 붙이고 인덱스로 표시해 둡니다. 쓰고 남은 노트를 잘라 만든 메모지 뭉치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낚아 적어 내려간 이 메모들은, 훗날 저의 정식 노트로 갈무리되어 한 권의 기록으로 완성됩니다.


필통의 가장 깊은 곳에는 빗과 안경닦이가 들어있습니다. 머리가 잘 엉키는 저와 제 머릿결을 똑 닮은 딸의 머리를 빗겨주기 위한 성근 빗, 그리고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고른 악보 그림의 안경닦이까지. 작아 보이는 필통 안에는 펜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저의 취향과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낡고 평범한 문구들이겠지만, 저에게는 이 도구들이 곧 저의 세계를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여러분의 필통 속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 있나요?


제 필통의 실제 모습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GvHzybmicsA?si=_5-vK3ARxJ3zStX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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