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니멀 독서 생활

젖은 책들을 말리며 깨달은 것들

by 어디

기록만큼이나 제 삶을 지탱하는 커다란 축은 독서입니다. 하지만 저의 독서 방식은 그리 특별할 것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꽤 단호한 구석이 있습니다. 바로 '소유하지 않는 독서'를 지향한다는 점입니다.


비에 젖은 책들이 가르쳐준 것들

20대의 저는 책을 사서 모으는 일에 참 열심이었습니다. 책이라는 물성을 내 공간 안에 들여놓는 것만으로도 그 지식이 온전히 내 것이 된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지요. '언제든 읽을 수 있다'는 안도감은 아이러니하게도 저를 책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습니다. 책장 가득 쌓인 책들은 읽히기를 기다리다 결국 먼지만 뽀얗게 뒤집어쓰곤 했습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어느 이삿날 찾아왔습니다. 사다리차로 짐을 올리던 중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졌고, 미처 옮기지 못한 책들이 비에 젖어버렸습니다. 며칠을 꼬박 젖은 종이를 말리며 고생하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읽지도 않는 '짐'을 지키기 위해 저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아이들이 태어나며 공간의 제약은 더욱 실존적인 문제가 되었고, 저는 비로소 수년간 모아온 책들을 중고 서점에 전부 처분했습니다.


빌려 읽는 즐거움과 나만의 독서 아이템

이제 저는 대부분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습니다. 소유의 무게를 덜어내자 오히려 읽는 행위 그 자체에 온전히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정해진 기한 내에 읽어야 한다는 적당한 긴장감은 게으른 독서 습관을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물론 빌려 읽는 독서에도 저만의 철저한 준비물은 필요합니다.


인덱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할 때마다 쟁여둔 인덱스를 붙여둡니다. 재활용을 하더라도 생각보다 빨리 소모되기에, 문구점에 들를 때마다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발견하면 미리 구비해두는 편입니다.

마스킹 테이프: 대여한 책에는 함부로 필기할 수 없기에, 밑줄 대신 얇은 마스킹 테이프를 문장 위에 덧댑니다. 다 읽은 후 이 테이프들이 붙은 페이지를 다시 넘기며 노트에 필사하고 제 생각을 덧붙입니다. 이 과정이 끝나야 비로소 한 권의 책을 완독했다는 실감이 납니다. 반납 전 테이프를 뗄 때는 종이가 상하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떼어내는데, 이 또한 책과 헤어지는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고정 집게: 필사할 때 책이 덮이지 않도록 잡아주는 필수품입니다. 한때는 아름다운 문진을 탐내기도 했으나, 어린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 무거운 문진은 자칫 위험한 도구가 될 수 있기에 가벼운 집게를 선택했습니다. 문단을 통으로 필사할 때는 위아래를 두 개의 집게로 고정하면 한결 편안하게 글을 옮겨 적을 수 있습니다.


도서관을 일상의 서재로 삼는 법

도서관을 일상의 서재로 삼으며 터득한 몇 가지 요령도 있습니다. 이용하는 도서관에 없는 책을 다른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상호대차'나, 원하는 신간을 도서관에 신청해 1순위로 대출받는 '희망도서 신청'이 그것입니다. 특히 희망도서를 신청할 때는 지역 주민으로서 공공의 서가를 함께 채워간다는 묘한 뿌듯함까지 덤으로 얻습니다. 베스트셀러처럼 대기가 긴 책은 미리 '예약'을 걸어두고 잊어버리는 게 약입니다. 어느 날 선물처럼 도착하는 대출 안내 문자가 일상의 작은 기쁨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거창한 서재보다 집 근처 도서관의 열람실이, 서점에서 갓 사온 빳빳한 책보다 손때 묻은 대출 도서가 저를 더 깊은 사유의 세계로 이끕니다. 비록 제 책장은 비어 있지만, 독서 노트 속 문장들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게 채워지고 있습니다.


사실 독서 생활의 정점은 이 모든 과정을 갈무리하는 '독서 노트'에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독서 노트는 일기장과 한데 묶여 있는 형태라, 다음에 노트를 한꺼번에 소개하는 자리에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려 합니다. 저의 이 작고 미니멀한 독서법이, 누군가에게는 소유의 강박에서 벗어나 읽는 즐거움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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