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49
정말 오래간만에 책을 완독 했다. 읽을 시간이 없다는 핑계와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읽어야 한다는 두 개념이 머릿속에 엉클어졌다.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은 정확하게 핑계가 맞다. 중량 운동과 더불어 고관절 운동을 병행하니 몸이 꽤 지쳐지었다. 특히나 관절 쪽이 불편했다. 간만의 고중량이었고, 늘어가는 중량만큼 중력은 크게 작용했으며, 모든 것을 내 몸으로 받치고 있었다. 물론 바쁜 업무도 한몫했다. 휴식이 필요했다.
아침 달리기와 운동을 잠시 중단했다. 아침과 저녁으로 시간이 많이 비었는데 책 읽은 시간이 없다는 것은 말 그대로 변명이었다. 변명에 대해 스스로 변론해보다가 말았다.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고, 아마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쓸모없는 시간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놓았던 것은 아니었다.
설거지로부터의 해방 운동을 벌이고 있는 엄마는 식기 세척기라는 신문물을 나에게 은근슬쩍 말을 던졌다.
"아니, 굳이 필요는 없어. 근데 유튜브 아줌마들 보니까 다 있더라" 라거나, 나를 부엌으로 끌어들이며
"여기 가스레인지 밑에, 이쪽이 원래는 식기세척기 자리거든...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라" 든 지
"있으면 진짜 편하더라. 그 뭐라더라... 신세계!, 신세계라더라."
이렇게 총 3개의 방식으로 엄마는 나와 내 통장을 압박했다. 압박의 수위는 날이 갈수록 빈번해졌고, 결국 며칠 전에 전자상가를 다녀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가전은 역시 LG라며 엄마는 손뼉 쳤다.
- 새는 알에서 나오려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 드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랍사스.
내가 완독 한 책의 구절과 내 엄마는 닮아있었다. 새로운 어느 것이든 엄마는 참지 않았다. 호기심에 늘 먼저 다가갔고, 만족에 찰 때까지 이해하려 했다. 그리하여 올해 환갑의 나이에도 스마트 폰의 여러 기능은 물론 웹서핑, 스마트 TV 그리고 그와 연동된 왓챠와 넷플릭스, 유튜브 등을 과감 없이 이용한다. 내가 리모컨을 들어 수많은 영화와 프로그램의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자면 어김없이 구조대인 엄마가 등장한다.
"그거 재미없더라, 그 옆에서 좀 볼만 해."
"저 아저씨 나오는 건 다 재미있어. 무조건 봐야 해."
"너는 꼭 틀어도 재미없는 것만 틀더라. 그것도 재주야, 재주."
나보다 더 전문적이며 능숙하고 개방적인 모습을 볼 때, 시간 속에 흘러가는 몸은 어쩔 수 없지만 정신과 자세만큼은 시간도 어쩔 수 없었다. 엄마의 무한한 한계에 대해 고민하다 리모컨을 빼앗긴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코로나 시국인 만큼 요즘은 못 가지만 예전의 해외여행에서도 엄마는 늘 앞장섰다. 말은 안 통해도 몸은 통 할 것이라며 '해외판 몸으로 말해요'를 진행하며 뭐든 경험해보고, 먹고 마셔봐야 직성이 풀렸다. 엄마는 이런 사람이었다. 늘 자신의 세계를 깨뜨리는 엄마는 내 삶에 있어 데미안이자 조력자, 그리고 구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