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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의 여자 Oct 15. 2020

입 속의 검은 잎

#에세이 44

지난 토요일 서점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찾아간 서점의 향은 그대로였다. 각 잡힌 책들은 정렬되어 있었고, 차분한 공기는 무거웠다. 서점 안 사람들의 복장은 제각각이었지만 손에 들린 책을 보면 묘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목적은 시였다. 


내가 알고 있는 시인은 대부분 교과 과정 속의 인물들이다.  김소월, 한용운, 이육사 등 그나마 박노해 시인이 범위 밖의 인물인데, 박노해 시인이 교과서 한 페이지를 장식하지 않는 점은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내가 알고 있는 시인은 적지만 시의 힘은 분명히 알고 있다. 


시의 힘은 위대한 한글에서 나온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같은 단어에서 나오는 숨은 뜻은 단어의 힘을 키우고, 문장의 깊이를 더한다. 더해서 겹쳐지는 것들은 잊힌 감정을 피어나게 한다. 그리고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내가 서점에서 집어 들은 시집은 '입 속의 검은 잎'이었다.


입 속의 검은 잎. 검은 잎 속에서 피어난 수많은 것들로서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 검은 잎은 최대한 감추고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생각했지만, 이미 썩어 검어진 것은 어쩔 수 없을 듯하다. 베어낼 수 없으니 더 들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걷어낸 표지 뒤의 첫 페이지 오른쪽 하단엔 서문이 위치했다. 시인 본인의 이야기, 그리고 한 생명으로서 당면해야 할 길에 대한 다짐이 짧은 글로 적혀있었다. 짧은 글은 넓게 퍼졌고 깊게 스몄다. 삶과 죽음을 쓴 글은 담담했고 처연했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시인은 89년도에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에 내가 태어나기 5개월 전이다. 그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있었을까? 

따라간 그곳에서 쏟아진 눈 위로 그의 발자국이 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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