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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튜라 Oct 04. 2020

너, 그거 직업병이야.

니가 학교에서나 선생이지, 집에서도 선생인줄 아냐?

  일반적으로 성인이 하루 8시간 이상, 하루의 1/3 이상 일을 한다. 사람마다 지나치고 많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삶의 3할은 일이다. 일과 삶을 분리하는 워라벨 문화가 유행하기 이전에는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워라벨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살기 위해 일하는 건지 일하기 위해 사는 건지 모를 정도로 삶의 많은 부분은 일에 할애되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그런 시대는 갔다. 요즘은 일과 삶을 분리시키는 게 유행이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 늘 그렇듯이 워라벨이라는 녀석도 우리의 일과 삶을 완벽하게 분리시키지는 못했다. 그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일을 하는 것도, 삶을 사는 것도 모두 한 사람의 몫이니 말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일은 생활에 자연스럽게 침투하여 같이 살아가게 된다. 어느 정도는 용인해 줄 수 있지만 다만 정도가 지나치면 병이 된다. 직업병.


  얼마 전, 티비를 돌리다가 우연히 유퀴즈 온 더 블럭이라는 tv 프로를 보게 되었다. 유재석 씨와 조세호 씨가 나와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흔하게 접할 수 없는 직업의 세계를 소개해 흥미가 생겨 계속 보게 되었다. 유재석 씨가 관제사로 일하시는 분에게 특별한 직업병이 있냐고 물었다. 관제사분께서 질문의 공백을 견디지 못한다는 직업병이 있다고 대답하셨다. 항공 경로를 안내하는 관제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조종사에게 관제 지시를 하면 반드시 곧바로 조종사의 응답이 있어야 한다. 질문과 응답의 틈이 없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다 보니, 집에서 자녀에게 어떤 요청을 할 때 참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예를 들어, 엄마가 ‘밥 먹어~’라고 말해도 자녀가 대답을 곧바로 하지 않을 때. 그 틈을 견디지 못하는 게 관제사의 직업병이었다.     


“니가 학교에서나 선생이지, 집에서도 선생인줄 아냐?”     


  선생님의 직업병은 무엇일까? 선생님은 무언가를 가르치는 직업이다. 그래서 자꾸 가르치려고 한다. 학교에서 하던 말이나 행동이 고대로 다른 곳에서도 이어져 직업병이 된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가르치려는 어투로 말을 하게 된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원하지 않은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는다. 너그러운 학생들은 선생질을 받아들여주지만, 다른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그럴 수가 없다.

  직업병의 피해자 중 상당수는 가족들이다. 특히 손아랫사람이 교사일 경우 가족들의 피해가 더 심각해진다. 

  동료 선생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준비할 때, 어머니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계속 퍼부어버린 것이었다. ‘엄마 이거 좀 해’부터 시작해서 ‘엄마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엄마 이걸 왜 이렇게 했어’... 내내 못마땅해 하시던 어머니께서 끝끝내 한마디를 남겨주셨다. “니가 학교에서나 선생이지, 집에서도 선생인 줄 아냐?”

  직업병이란 놈이 늘 그렇듯이 자신은 모르게 그렇게 해버린 것이다. 참 무서운 병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술에 적당히 취하자 친구들은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고 전혀 대화가 되지 않았다. 한 놈은 꽥꽥 소리를 질러대고 있고, 또 한 놈은 구시렁 구시렁대고 있고, 다른 한 놈은 혼자서 딴짓을 하고 있고. 더 이상의 소음 유발과 혼란을 견디지 못한 나는 표정을 찡그리며, ‘야 다 조용히 해봐, 차례대로 이야기하자, 너부터 이야기해봐.’하며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그렇지만, 친구들은 친절히 내 지도에 따르지 않았다. 친구들은 원하지 않은 지도에 반항했다.     


“야, 선생님 나왔다. 선생님.”

“와, 이 새끼 여기서도 선생질하네”     


  순간 뜨끔했다. ‘이게 직업병이구나’하고.      


  원하지 않은 질병이 이미 심각한 상태라는 사실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직업병은 삶의 태도에 전염돼버린다. 그래서 직업병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방식, 말하는 방법, 무의식적인 뉘앙스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변하게 된다.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직업병은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소통 방식이 오해를 사기 쉽기 때문이다.

  선생의 직업병은 특히 그 정도가 심하다. 학생들을 가르치듯이, 학생들을 지적하듯이 타인을 대하면 인간관계가 어려워질 확률이 매우 높다. 주변에서 꼴 보기 싫은 놈이 되기 십상일 것이다. 누가 나를 가르치고 지적하려 든다면,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처럼 남을 가르친다는 일이 참 주제넘는 일이다. 이런 선생의 자세가 삶의 태도가 된다면 여러모로 좋지 못하다. 내 직업은 선생이지만, 삶의 태도가 선생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남을 가르치려는 자세는 남을 자기 아래로 내려다보는, 심하게는 깔보는 태도를 기르게 될 것이다. 또 이런 태도는 상황을 단정 짓고 자신은 늘 옳다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 참 위태롭기 그지없다. 선생의 직업병은 삶을 위태롭게 하는 심각한 중병이다.     


선생보다는 학생으로 살아가기     


  그 직업을 그만두지 않는 한, 직업병을 고치기는 힘들다. 선생을 그만둘 생각은 아직 없으니, 당분간은 이 병과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완치는 불가능할지라도 병세를 호전시킬 치료요법에 대해 고민해봤다. 해답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남을 가르치려는 자세에서 병이 도지기 시작한다면 그것과 반대되는 것이 해답이 아닐까. 내가 선생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선생으로 생각하고 늘 배우려는 학생의 자세를 갖추는 게 더 바람직해 보인다. ‘먼저 배운 놈’이라는 선생(先生)이라는 한자어가 의미하듯이 더 많이 배우려는 자세가 진짜 선생의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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