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해석 3 - 책과 영화와 게임의 잔상은 얼마나 강력할까
* 꿈의 기록입니다.
일본의 어느 바닷가가 펼친다. 아주 작은 해안 도시. 어두파란 구름이 부서지는 전봇대 끄트머리에까지 낮게 덮인 구름의 마을. 구름이 마을의 온 지붕 위를 다 덮어 해가 보이지 않는다. 해가 없어도 암흑은 아니어서 우중충한 하늘이다. 오후 다섯 시나 되었을까. 아니면 오전 다섯 시인 걸까.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하늘. 습하고 시원한 공기. 답답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청청한 바다 공기가 입으로 들어와 뇌의 속 중심을 비집고 통과해 귀를 뚫고 나간다.
인구가 만 명이나 될까. 읍내엔 사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낡게 펼친다. 집들은 모두 단층의 폐가. 시퍼런 슬레이트 지붕들이 낮게 깔리고 우중충하고 갈라진 회색 벽들이 볼품없게 늘어진다. 구리색 알루미늄 창틀에는 깨질 듯이 가녀린 유리창이 끼워지고.
인도는 한두 사람이 다닐 만한 너비. 깨지고 파헤쳐진 블록 조각들이 널브러지고 바닥도 고르지 않은 보도블록들로 짜 맞춰진다. 자연스레 전봇대들도 사탑처럼 기울어진다. 종종 보도블록 사이로 바다 공기를 머금은 잡초가 자란다. 길가에는 집들이 낮고 도로에는 차가 하나 없어 읍내의 도로는 텅 비어 보이다 못해 넓어 보인다. 공허.
이 거리는 무엇을 닮았을까. 어린 시절 가족들의 손을 잡고 걷던 양양 읍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던 나가사키의 읍내. 「8월의 크리스마스」가 기록되는 사진관이 존재하던 거리. 청소년의 끄트머리에 갈아타는 고속열차를 놓쳐 잠시 머무르던 노을 같은 마을. 스무 살의 첫여름 주황색 새벽비가 파도별처럼 쏟아지던 인천의 어둡고 황량하던 찻길. 사람의 목숨을 무자비하게 삼키는 드라이버가 올드카를 타고 「드라이브」 하던 LA 교외 거리. 그런 기억의 조각들은 볼록 조각 아스팔트 가루들이 되어 순식간에 꿈속의 읍내 거리를 재현해낸다.
사실 이 마을은 우리나라 영토이다. 꿈꾸는 나도 의아하다. 무려 수도권 지하철과 연결된 마을이다. Q호선 ‘도요 역’이다. Q호선을 타면 바다를 건너 이 마을에 도달한다. Q호선 지하철이 어떻게 바다를 건넌다는 건지. 그건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속 제니바의 집으로 가는 기차 같아서 맑고 얕은 바닷물에 기찻길이 수놓아지는 건지. 기차는 바다 철로를 따라 수면 위를 가볍게 운행하면서 평평하고 평화로운 밤과 새벽을 지나 일몰과 노을도 지나, 그렇게 동해바다를 건너 이곳 작은 마을로 소리 없이 도달하는 건지. 꿈속에서 머릿속으로 그런 상상을 잠시 해 본다. 꿈속의 꿈을 꾼 적은 없지만 꿈속의 꿈을 꾼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마을 지하의 작고 쾌적한 PC방에서 벗들과 게임을 한다. H와 T, 그리고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메이플스토리」를 하다가 자쿰이라는 보스 몬스터가 나온다. 문득 진짜 자쿰이 궁금해진다. 혼자 지상으로 올라가 진짜 자쿰을 만나러 가보기로 한다.
진짜 자쿰은 사실 나무이기에 숲으로 가기로 한다. 마을을 벗어나 울창한 숲에 다다른다. 「모노노케 히메」의 하얀 유령들이 사는 숲. 수많은 사람들의 혼이 거두어진다던 자살의 숲. 여행자의 혼이 안식하는 편안한 슬리피우드. 해는 없으나 빛은 있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우중충한 빛이다. 편안한 새소리와 해골들의 울음소리가 번갈아 들린다.
숲은 기나긴 평지다. 숲의 바닥은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들로 깔린다. 나무들은 그렇게 크거나 굵지 않다. 다만 튼튼하다. 다부진 나무들은 두 번 세 번 휘어 깊은 굴곡을 만들어낸다. 이윽고 온 벽과 천장이 나무줄기와 나뭇잎으로 촘촘히 엮인 터널이 만들어진다.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터널을 나온다. 지금까지 걸은 길은 두 갈래 길이 모아져 하나의 큰길이 되는 길이다. 나는 그 두 갈래 길 중 하나의 길을 택해 걷는다. 두 갈래의 길은 합쳐져 하나의 단일한 길이 된다. 그 단일한 길 속에서 중년의 마른 여자가 우산을 쓰고 나온다. 일본인이다. 얼굴에는 팔자주름이 깊게 파이고, 숏 컷의 머리는 아무렇게나 삐친다. 몸에 붙는 반바지를 입고 나무색 슬리퍼를 신는다.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레이코 씨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레이코 씨의 표정은 우중충하지만 튼튼한 비닐우산 같다. 그녀의 주변에 비는 오지 않지만 비가 올 때 느껴지는 한기와 습함이 우산 주변으로 풍겨져 나온다. 레이코 씨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나도 그 다가옴을 몸으로 느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비, 빗소리도 들리지 않는 비, 땅에 떨어지는 촉감이 나지 않는 비가 나에게 온다. 비가 오는 온도와 습한 촉감이 내 몸과 뇌를 적신다. 레이코 씨에게 자쿰이 어디 있는지 물어본다. 그녀는 자기가 걸어온 길을 가리키며 이 길로 쭉 들어가면 나온다고 답한다.
그 길로 곧장 걸어간다. 더 이상 비는 오지 않지만 비가 올 때의 느낌은 계속 느껴진다. 이 길의 나무들은 아까의 나무와는 다르다. 열다섯 살에 가 본 일본의 삼천 년 된 삼나무 숲 같은 웅숭한 숲. 선운사 가는 길의 깊은 선운산 숲. 전봇대처럼 높고 긴 나무들이 하늘에 뿌리를 박고 선다. 아까 숲의 검고 깊은 초록색이 아니라 파릇파릇하고 밝은 연두색 숲이다. 숲은 기나긴 평지다. 숲의 바닥에는 연두색 잎사귀들이 누워 바스락거린다. 가벼운 햇살이 잎사귀들 사이로 졸졸졸 흘러 내려온다.
얼마쯤 걸었을까. 자쿰이 보인다. 자쿰은 돌도 아니고 바위도 아니다. 자쿰은 나무다. 끝없이 어둡고 깊은 고동색의 나무다. 밧줄처럼 길고 굵은 나무줄기가 숲의 바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나무줄기는 하늘 위로 끝없이 뻗어 숲의 천장까지 다다른다.
숲의 천장에는 나무줄기와 비슷한 굵기의 나무의 가지들이 뻗어난다. 나뭇가지들은 나무줄기 끄트머리에서부터 나와 히드라처럼 한 줄기에서 여러 머리를 가진 형태로 창조된다. 구미호, 히드라, 문어 같은 형태이다. 길게 뻗은 나뭇가지들은 자쿰의 손처럼 천천히 흐물거리며 춤을 춘다.
자쿰은 악당이지만 악당 같은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거룩하다. 커다란 손 같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면서 풍겨져 나오는 성스러운 피톤치드는, 마음을 웅장하게 하기에 충분한 듯하다.
그런데 자쿰 너머 저 뒤에 자쿰보다 더 맑고 거룩하게 피톤치드를 풍기는 나무가 보인다. 나무는 하도 커서 전체가 다 보이지도 않고 나무 밑동만 보인다. 그런데도 그 나무는 거룩한 후광을 뿜어내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세계수다. 헛된 꿈을 좇듯 세계수를 따라서 걷는다. 하지만 세계수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저 평범하고 깊은 어느 숲길만이 나올 뿐이다. 촘촘하게 자라는 나무 사이로 마지막 배경이 보인다. 마지막 배경은 회색빛의 낡고 낮은 빌딩들이 켜켜이 쌓인 우중충한 도시다.
결국 숲에서 나온다. 도시가 나온다. 맨 처음 보았던 작은 마을이다. 우중충하고 칠흑같이 어두운 오후 다섯 시다. 학교가 파하는 시간대이리라. 나는 짙은 남색 교복을 입는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H를 만난다. H가 오늘 학교 끝나고 우리 집에서 밤까지 놀다 가라고 한다.
나는 알겠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무언가 이상하다 싶다. 이곳은 꿈속인데 어떻게 밤까지 놀다 가라는 거지? 꿈에서 깨면 아침인데, 꿈에서는 밤이 오는 것이 아니라 점점 아침이 오는 방향으로 시간이 전개되는데 어떻게 시간이 밤으로 전개되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꿈을 꾸는 사실을 나 자신이 알아버린 것일까.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H와 함께 가다가 T를 만난다. T는 짧은 반삭 머리에 교복을 입은 채로 인사한다. 우리 셋은 함께 걷다가 어느 떡볶이집에 멈춰 선다. 노란색 간판, 노란색 문, 노란색 파사드. 모든 것이 노란색인 낡고 유치한 떡볶이집이다. 식당 내부는 삼각형으로 이루어진다. 너무 좁아 들어갈 자리가 없고 여느 떡볶이집이 그렇듯 밖에 서서 선술집 테이블 같은 테이블에 몸을 기댄다.
이 집은 자동화 기계를 이용하여 계산하는 시스템이다. 자동화 기계 역시 노란색이다. 자동화 기계를 이용하려면 기계 속에 우리 각자의 지갑을 맡겨야 한다. 우리는 기계를 열고 지갑을 넣는 틀 속에 우리의 지갑을 넣는다. 떡볶이집 아줌마는 빨간색 앞치마를 두른다. 「말죽거리 잔혹사」 속 김부선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부선은 아니다. 김부선보다 젊고 아름답다. 모래색 얼굴빛과 아무렇게나 말아 묶은 머리, 그리고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만 김부선이다.
떡볶이 철판에는 떡볶이가 하나도 없다. 기름칠만 번지르르하다. 사장님은 지금은 떡볶이가 다 떨어져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다. 사장님이 냉동떡을 철판에 붓는다. 빨간 양념이 배지 않은 하얀 떡볶이 떡이지만 떡볶이가 철판에 닿아 치이익 소리를 내며 뜨겁게 녹을 때, 화상 입은 피부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피와 물집과 진물처럼 떡볶이의 양념도 그렇게 빨갛게 치이익 소리를 내며 철철 흘러나오고 핏방울이 튀듯 빨간 국물이 철판 표면에 이리저리 튀어나온다. 사장님은 검은 비닐봉지에 떡볶이를 담아주신다. 내가 떡볶이를 받는다. 받으면서 비닐을 만져 본다. 따뜻하지만 많이 딱딱하다.
떡볶이와 친구들은 없어지고 나는 집으로 온다. 빨래가 돌아간다. 시간 표시란에는 35라는 숫자가 나온다. 할머니가 침대에 눕고 고모가 할머니를 보러 온다. 고모는 할머니를 놀라게 하려고 마스크를 쓰고 할머니 방으로 들어간다. 오늘부터 새로 온 요양보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하고는 이불속에 얼굴을 파묻는다. 할머니는 눈치 채지 못한다. 고모가 마스크를 벗고 할머니에게 얼굴을 보이자 그때에서야 울음 반 웃음 반이 되어 반갑다고 고모와 포옹을 나눈다.
빨래가 다 된 알림음이 울린다. 세탁기실로 가 본다. 드럼 세탁통엔 물이 찰랑찰랑 차고 쥐색 셔츠 하나가 수족관의 메기처럼 온몸이 물에 젖은 채 세탁통 아래로 흐물거리며 탈출을 시도하다 기절한다. 물이 가득 담긴 빨래 바구니에는 세탁물들이 온통 물에 젖어 미꾸라지처럼 유연하게 헤엄친다. 시간 표시란에는 117이라는 숫자가 명멸한다.
세탁물들을 다시 세탁기에 욱여넣는다. 모든 설정을 최강으로 맞춘다. 다시 빨래를 돌린다. 빨래가 시작되는 알림음이 울리나 시간 표시란에는 아무런 숫자도 뜨지 않는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세탁통 안에는 많은 옷들이 고래처럼 빙글빙글 돌며 유영한다. 이윽고 세탁기는 미친 듯이 빨리 돌아, 세탁통 안은 깊은 물속처럼 온통 어둡고 끝없는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시간 표시란에는 여전히 아무런 숫자도 뜨지 않는다.
「인셉션」의 토템처럼, 세탁기는 지금도 내 꿈속에서 영원히 돌아가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