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해석 2 -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면 왜 항상 다툴까
* 꿈의 기록입니다.
우리는 리조트로 여행을 떠난다. 바다와 접한 한적한 시골의 최고급 리조트다. 스파에서 수영을 하고 뷔페에서 화려한 양식과 베트남 요리를 먹으면서 여섯은 하나가 되고 하나는 또 여섯이 된다.
우리는 모두 방에 모여 앉는다. 탁 트인 테라스 발코니에 파란 바다와 하늘이 펼친다. 발코니 구석에는 주황색 큰 선물상자가 존재한다. 우리는 모여 앉아 상자를 연다. 상자 안에는 자욱하게 연기가 오르고 안개가 낀다. 뭔가가 꿈틀거리더니 거대한 호피무늬 호랑이 한 마리가 튀어나온다. 우리는 다 옆으로 피하지만 L은 도망하지 못하고 다리와 허리가 모두 물려버린다. L의 비명. L과 십 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처절한 소리.
L은 실려가고 우리는 모여 그 상자를 다시 연다. 또 호랑이다. 이번엔 L의 쌍둥이 동생 R이 물린다. R도 L처럼 다리와 허리가 모두 호랑이에게 삼켜지고 잘린다. R의 비명은 더 처절하다. 범죄자에게 죽임을 당할 때의 비명이다.
비명과 함께 모든 화면이 흑색으로 컷아웃된다.
리조트의 로비가 펼친다. 하얀색 윤이 나는 대리석 기둥들과 바닥으로 이루어진, 노란 조명 분위기의 아담하고 고급진 스파의 로비다. 로비 한구석 소파에 다섯이 쪼르르 앉는다. L은 있는데 R이 없다. R이 결국 죽었다는 말이 귀에 담긴다. 모두들 담담하다. L조차도.
나는 너무 슬퍼 있는 울음을 다 울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눈물방울만 조금 나올 뿐이다. 벗들은 또 가식이라고 분위기 파악을 하라고 한다. 나는 억울해서 소리를 지른다. 외치는 소리가 로비를 너머 리조트를 품은 파란 하늘에까지 다다른다. 파란 하늘 너머엔 꿈꾸는 자의 뇌가 우주처럼 펼친다. 아우성은 뇌의 주름을 타고 꿈꾸는 자의 침대 위로 젖어 흐른다.
집에 갈 시간이 되어 지하철을 타러 간다. 처음엔 S 그리고 W와 동행한다. 우리는 종로N가역에서 종로M가 역으로 한 역만 이동하면 되는 사람들이다.
종로N가역으로 내려간다. 꿈속에서의 내려감은 곧 자유낙하이다. 지하로의 끝없는 에스컬레이터.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 역의 기다란 에스컬레이터처럼 종로N가역도 그렇다. 사람 한 명만 설 수 있고 머리가 닿을락 말락 하는 작은 굴 같은 에스컬레이터. 주광색 형광등이 깜빡깜빡 명멸한다.
우린 종로N가역 플랫폼에 선다. 우리 빼고는 아무도 없다. 여름이지만 서늘함을 넘어 냉기가 느껴진다. 플랫폼은 끝없이 길다. 끝이 보이지 않는 플랫폼의 끝과 지하철의 동굴은 어둡다.
플랫폼의 벽과 바닥은 다 부서져가는 회색 콘크리트와 녹슨 회색 알루미늄으로 덮인다. 거멓다. 주광색 형광등이 듬성듬성 켜져 명멸한다. 「서울 1964년 겨울」 같은 으스스한 느낌. 그곳은 마치 슬픈 아저씨의 부인이 죽는다던, 지하 병원의 영안실 같다.
지하철이 기괴한 비명과 마찰 소리를 내며 서서히 미끄러지듯 다가온다. 작고 짧은 지하철이다. 런던의 튜브보다도 더 작다. 긴 의자에 앉으면 맞은편 사람과 무릎이 부딪힐 정도. 내부는 역보다는 조금 더 따뜻하고 밝다. 그래도 분위기는 암울하다. 옆으로 앉는 긴 의자에 우리는 주르륵 앉고 사람은 젊은 여자 셋의 무리밖에는 없다.
지하철이 흔들리며 이동한다. 우린 종로M가까지 한 역만 이동해야 하지만 이야기하는 사이에 너무 많이 와 버린다. 지하철은 종로M가를 넘어 이미 동대문구와 도봉구를 통과한다. 이제 지하철은 어느 역에도 서지 않고 빠르게 달리고, 그래서 우리는 그냥 종점까지 내딛고 돌아오기로 한다.
지하철이 지상으로 나온다. 하늘이 어두파랗다. 모색. 개와 늑대의 시간. 가장 깊은 새벽에서 아침이 되어가는 하늘. 혹은 노을이 다 지고 밤이 되어가는 하늘이다. 아니, '되어가는' 시간이지만 꿈꾸는 자의 하늘 속에서는 되어가지 않는다. 그 시간의 하늘 그대로 꿈이 끝날 때까지 멈춘 채로 존재할 뿐이다.
지하철 구조가 바뀐다. 봉고차처럼 앞을 보고 앉는 방식이고 차체도 매우 좁다. S가 조수석에 타고 W와 나는 각각 그 뒷칸 왼쪽과 오른쪽에 탄다. 여자 셋도 뒤에 탄 듯하다. 기관사의 얼굴은 볼 수 없다. 사실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인지 얼굴이 없는 것인지 불확실하다.
지하철은 이제 논밭을 가른다. 길섶에는 아주 약간의 풀과 나무가 자라 지하철이 달리는 속도만큼 뒤로 멀어진다. 부대에서 행군을 마치고 돌아가던 시골 저녁 둑방길 같은 길을 지하철은 시원하게 질주한다. 창문을 열어 바깥바람을 쐰다. 짙고 어두운 저무는 색의 바람들이 얼굴을 타고 흐른다. 자유로운 탄환 같은 바람들. 어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총구에서 퍼져 나오는 별똥별처럼 잘못 쏘아진 오발탄 같은 흐름들. 총을 쏘듯 나는 바람을 쏘아 올리고 바람도 나를 쏘아 올린다.
이윽고 지하철은 끝없는 삼나무 숲길을 파고든다. 오래전 일본에서 걷던 수천 년 된 삼나무들. 눈이 펑펑 쏟아지던 제주 사려니숲에서 뛰놀던 곧바른 삼나무들. 그런 삼나무들보다 얇고 긴 삼나무가 줄줄이 박힌 길 위를 지하철이 가른다. N호선이 지나는 동호대교의 철골 구조처럼 가운데에는 우리 지하철이 달리고 양옆으로는 자동차의 물결이 뒤따라온다. 하늘은 계속 어두파랗다.
운전석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삼나무 숲 너머는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답다. 끝없는 차와 도시의 물결들. 붉은색 점과 노란색 점의 별무리들이 잭슨 폴록의 물감처럼 질서 있게 흩뿌려지고, 그것들은 코스모스를 창조하는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의 행로를 따라 은하계 속에서 웅숭깊게 운행한다. 치히로가 탔던 열차의 밤 차창으로 보이는 유흥과 거대도시의 선율들이 검은 깊음 속을 유영한다.
꿈속의 철로는 지금까지 꿈꾸는 자가 탑승하던 수많은 기차들이 지나가는 길이다. 삼랑진 역을 지나 마산역까지 가던 새마을호 밤기차. 케임브리지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던 어둡고 저무는 색의 하늘 아래 열차. 고흐가 죽은 마을에서 다시 파리로 돌아오던 검은 밤전철. 모든 것이 한 줄로 이어진 듯 오버랩된다.
그때의 열차와 저때의 열차를 순서대로 생각한다는 건, 꿈꾸는 나의 뇌 속 과거의 내가 이 칸에서 저 칸으로 걸어 이동한다는 걸 의미한다. 다음 칸으로 기억이 옮겨갈 때마다 이전 칸은 다음 칸과 끊어져 어두운 기찻길 너머로 영원히 사라지는 듯하다.
꿈속에서 기억이 옮겨가는 찰나, 지하철이 탈선하기 시작한다. 지하철은 가운데 철로를 넘어 양옆 차들이 흐르는 도로로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며 왔다 갔다 곡예한다. 우리는 지하철을 따라 흔들린다. 오르막길도 질주하고 내리막길도 무중력 상태로 자유 낙하한다.
검은 물에 하얀 물방울 무리가 들이닥쳐 팍 퍼지듯 갑자기 날이 밝고, 지하철은 어떤 간이 지하철역의 지하 출구 - 사람과 차들만 오르내릴 수 있는 출구로 충돌할 것만 같다. 나는 지하철이 충돌하기 직전 박하사탕처럼 극적으로 열차에서 몸을 던져 탈출한다. 지하철은 곧바로 동굴 같은 출구 속으로 곤두박질친다.
열차가 동굴에 머리를 처박고 죽는다. 나와 S는 탈출하지만, W는 탈출하지 못한다. 그래도 W는 죽은 열차 속에서 옷을 탈탈 털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멀쩡히 걸어 나온다. 다행이다.
우리는 간이역의 플랫폼으로 걸어간다. 지상으로 올려진 역이다. 갈색 벽돌과 타일로 이루어진 작은 역이 펼친다. 거기서 우리는 죽은 R과 재회한다. 플랫폼에서는 달걀 프라이와 핫도그 같은 음식을 판다. 우리는 종류별로 왕창 시켜 간이 테이블에서 먹는다. 나는 간식을 펼쳐놓고 내 거 네 거 없이 다 같이 먹는 줄로 알고 R의 달걀 프라이와 햄버거빵을 한입 가져가 먹으려 한다. 그때 Z가 나를 쏘아댄다. 진아 너는 R한테 허락받고 먹는 거야? 나는 무안해져서 R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다시 음식을 가져다 놓는다.
처음 탄 지하철 안에서 만난 여자 셋 무리가 나를 보며 저들끼리 비웃는 소리가 뇌의 주름에 퍼진다. 시들은 웃음소리들이 낙엽처럼 뇌수의 표면을 유영한다. 낙엽이 뇌수에 젖어들듯 나는 아침햇살에 잔잔히 젖어든다. 꿈은 한 장의 소설처럼 뇌수 속에 잘 간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