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진 Mar 11. 2021

우리는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영화를 쓰다 3 - 「퐁네프의 연인들」과 파리의 우울

 

1. 정말 아름다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데

 

 섬 하나가 외로이 늙고 있었다. 세느 강의 중심에 솟아오른, 파리의 발상지 시테 섬이었다. 섬 끄트머리에서 한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왜 그림을 그리냐고 물었고 그녀는 눈짓으로 답했다. 눈앞에 있는 것들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눈앞의 세상을 그린다는 건 무언가 모순되는 말이었지만 파리에선 그렇지 않았다.

 

 오래전 그녀는 한쪽 눈알을 세느 강에 빠뜨렸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잃어버린 눈알을 찾기 위해 매일 밤 퐁네프 다리 위에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녀가 작업하던, 다리 중턱의 움푹 파인 돌의자에 앉아보았다. 그 날의 슬픔과 가난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젠 파리의 아름다움만 남았다.

 

 문득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것들은 정말 아름다운 것인가, 생각하며 세느 강변의 모래를 쥐어보았다. 여객들이 버리고 간 한 줌의 의미 없는 추억들로 채워진 빈 아름다움 한 옴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갔다. 모든 것이 흘러갔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데,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다운 불빛들이 두 눈에 보이고 있었다.

 

오래전 그녀는 한쪽 눈알을 세느 강에 빠뜨렸다고 고백했다.

 

2. 화려한 파리의 밤하늘이 불꽃놀이를 하듯

 

 퐁네프 다리 위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다 이루었다' 말하고 나무에 달려 숨을 거둔 어느 행복한 남자의 말처럼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여인의 연인이었던 어느 미친 남자는 이미 죽어 없어진 이름 모를 장군의 기마상에 올라가서 품에 품은 권총을 막 쏘아댔다. 총에는 탄환 열네 발이 재어져 있었고, 에펠탑도 비추지 못하는 파리의 깊은 어둠 위에 그는 에펠탑보다 위대한 탄알을 열세 번 파리에다 대고 쏘아 올렸다.

 

 그리고 이제 총구에 거룩하게 올려진  하나의 . 초승달이 조금 기울어졌을까, 총성이 울렸고 총구에서는 희생물의  없는 향내가 풍기어 나왔다. 그는 마지막 탄환을 자기의 손바닥에  것이었다. 관통된 상처 사이로는 못자국처럼 피가 솟구쳤고, 어느 의심 많은 그의 친구는 구멍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눈알을 갖다 대어 보았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고장  조리개 속에서는 화려한 파리의 밤하늘이 불꽃놀이를 하듯, 빨간 피가 죄처럼 아름답게 춤을 추고 있었다.

 

 남아있는 단 하나의 탄을 기꺼이 자신에게 바친 비참한 남자처럼, 마지막 잔탄을 쏘아 올릴 마음의 준비가 나에게도 되어 있던가. 나는 부끄러웠다. 로댕의 청동 조각상처럼 부끄러운 것들이 자꾸만 밀려왔다. 그 녹슨 구리 거울, 푸른 동상들 표면에 부끄러운 나의 표상들이 자꾸만 일렁이었다. 나는 마지막 탄을 쏠 수 없다고도 나 자신에게 자책해보았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너무 많이 와버렸고…

 

 총구에서 솟아오른 마지막 탄환. 그것은 정지용의 향수처럼 너른 들판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함부로 쏘아버려, 누구도 찾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영원히 넘어가버린 총알 한 발이었다. 새벽이슬에 함추름 젖은 바지저고리를 붙잡고 달렸지만 이제 나에게 더 이상 그런 이슬방울은 맺히지 않았다. 그저 아름답고 탁한 세느 강의 얼룩들만 묻을 뿐이었다.

 

에펠탑처럼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었다.

 

3. 에펠탑으로 남거나 세느 강을 떠나거나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건 어디론가 영원히 떠나버린다는 것. 그것은 두렵지만 아름다운 일이다. 눈먼 여인과 미친 남자는 마지막 밤, 세느 강을 떠나는 기다란 바지선을 타고 아름답게 파리를 떠났다. 뜨거운 여름밤 강변을 덮었던 잔모래들이 태어난 바다로 , 그들은 한 줌의 모래 같이 아스라이 세느 강을 떠났다.

  

 단 하나의 에펠탑처럼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파리지앵은 아름다운 철골보다 나약하고 가벼운 존재이기에 우리는 그들처럼 떠난다. 에펠탑으로 남거나 세느 강을 떠나거나. 어느 파리지앵에겐 둘 중 하나의 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깊은 밤 세느 강을 메우던 잔모래 별들이 태어난 알지 못하는 바다 위로 마지막 탄환을 쏘아 올린다. 이방인이 쏘아 올린 작은 총알이다. 세느 강이 바다 건너 저쪽으로 흐르듯 우리는 더 이상 이 아름다운 곳에 머물 수만은 없다. 모든 것이 아름답게 두 눈에 보이는 곳을 떠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보이지 않을 때 더 아름다운 곳으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우리는 그렇게 어디론가 떠나야만 할 것이다.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작은 권총, 그리고 아직 관통되지 않은 얇은 손바닥 하나 가지고서.

 

매거진의 이전글 소중한 관계 속에서 성장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