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쓰다 6 - 「코미디의 왕」과 「조커」의 '믿음 시스템'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 Charlie Chaplin
한 영화와 다른 영화 사이의 극적 거리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두 개의 나란한 평행우주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하지만 가끔은 우연처럼 운명처럼, 두 필름이 무한한 평행우주의 경계를 뛰어넘어 서로 특별한 지점에서 경이롭게 입맞춤을 하는 순간이 있다.
영화 「코미디의 왕」과 「조커」가 그렇다. 두 영화는 다른 시대에, 다른 장소에서, 다른 배우와, 다른 영화적 시점으로 제작되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게 닮아있고 조직적으로 이어져있다. 영화의 인물과 소재, 그리고 주제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진하게 포옹하는 현장을, 두 필름 사이의 궤도를 쫓아 따라가 보자.
1. 인물
40대 초반의 젊은 배우 '로버트 드 니로'는 「코미디의 왕」에서 망상에 빠져있는 아마추어 코미디언 '루퍼트 펍킨'을 연기한다. 그리고 그는 그 능글맞은 모습 그대로 40년 뒤 80대가 되어, 성공한 코미디언의 대부 '머레이 프랭클린'으로 「조커」의 스크린에 투사된다.
이는 한 코미디언의 가난했던 젊은 시절과 훗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코미디 대부로서의 노년 시절이 오버랩되어 있는 듯한 영화 간의 연결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코미디의 왕」 속 '루퍼트 펍킨'이 정말로 성공해서 나중에 「조커」 속 '머레이 프랭클린'이 되었다는 흥미로운 가정은 두 영화를 의미 있게 이을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다.
2. 권총
두 작품 모두에서 '권총'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조커」에서 권총은 불우한 조커 '아서 플렉'의 모든 계획을 실현시킨다. 그는 권총으로 지하철에서 자신을 조롱한 부유한 금융맨들을 살해하고, 사회에 불만을 가진 고담 시민들을 응집시킨다. 그의 권총 한 자루는 '조커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그는 그 동일한 권총으로 자신의 롤모델 '머레이 프랭클린'의 눈을 뚫어버린다.
「코미디의 왕」에서도 권총은 '루퍼트 펍킨'과 그의 스토커 파트너인 '마샤'의 모든 계획을 완성시키는 결정적인 도움의 도구로 기능한다. 작은 권총 한 자루는 결국 아마추어 코미디언 '펍킨'의 TV쇼 출연을 성사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하지만 두 작품의 결말부에서 묘사되는 총의 성질과 실체는 조금 다르다. 「조커」에서 권총은 소중한 목숨들을 앗아간 잔인한 혁명의 총이었으나, 「코미디의 왕」에서는 그저 스티로폼 총알을 찔꺽찔꺽 뿜어대는 장난감 총일 뿐이었다. 동일한 권총이 「조커」에서는 매우 어둡고 끔찍하게 그려지지만, 「코미디의 왕」에서는 씁쓸하면서 실소적인 블랙 코미디로 묘사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 속 권총은 두 코미디언을 모두 파국으로 이끄는 비극적 장치로 작용한다. 고담과 뉴욕을 대표하는 시대의 조커였던 '아서'와 '펍킨'은 권총 덕분에 코미디 쇼에 출연하며 하룻밤의 왕이 된다. 하지만 왕의 자리에 앉게 해 준 그 동일한 권총으로 인해 코미디언으로서의 그들의 운명은 결국 구멍 나 버린다. 이렇게 두 코미디의 왕의 극적인 최후는 코미디를 시청하는 관객에게, 영화를 관람하는 우리에게 허무하고 불쾌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감독은 이내 관객이 느끼는 허무함과 불쾌감을 감정의 극적 정화로 탈바꿈시킨다. 바로 '아서'와 '펍킨'이 체포되어 경찰차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도시의 어두운 밤바람을 마시는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의 이러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우리는 그 장면에서의 배우의 표정과, 음악의 분위기와, 카메라의 색감을 통해 비로소 '코미디의 비극적 카타르시스'라는 희비극의 채플린적 패러독스를 경험한다. 이는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말한 찰리 채플린의 철학이 무겁게 반영된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감독의 치밀함과 영화의 긍정적 효용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3. 코미디와 우정의 상대성
두 작품에서 코미디와 우정은 상대적이다. 「조커」에서 '아서 플렉'은 웃긴 것의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사람에 따라 코미디는 상대적이라고 말한다. 그에게는 자신을 조롱한 금융맨을 죽인 행위가 너무나 정의롭고도 재미있는 코미디이다. 그는 코미디가 재미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 하나의 콩트가 TV쇼에 나오기 적합한 건전한 코미디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기득권자라고 말한다. 즉 그는 기존의 코미디를 더욱 견고하게 굳히는 사람들이 '프랭클린 머레이'와 같은 기득권 코미디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 「코미디의 왕」에서 '루퍼트 펍킨'은 스타 코미디언 '제리 랭포드'에게 '우정은 상대적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은 '제리'에게 한없는 관심과 열망을 품었지만 '제리'는 자신의 코미디 녹음테이프조차 들어주지 않는다고 분노한다. 결국 '펍킨'은 우정의 상대성을 빌미로 '제리'를 납치하는 반인륜적인 범죄 행위를 저지른다. 영화가 전개되는 내내 '펍킨'은 자신의 코미디가 '제리'에게도, 더 나아가 모든 이에게도 '상대적으로' 재미있을 것이라 망상하며 헛된 코미디를 반복하고, 결국 '제리'를 납치하는 범죄 행위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인질극을 통해 성사된 '펍킨'의 마지막 10분간의 스탠딩 코미디 또한 '코미디의 상대성'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그의 코미디는 생각보다 재치 있었으며, 생각보다 웃겼다. 정말로 코미디에 재능이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무엇이 코미디언의 인기를 결정하는 걸까? 해당 코미디가 방송에 출연할지 말지는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 걸까?
마틴 스콜세지와 토드 필립스 감독은 '아서'와 '펍킨'이 옹호하는 상대주의의 가능성을 연출하며, 관객에게 기득권 코미디언과 대중들, 그리고 기존의 코미디에 의해 코미디언의 인기와 코미디의 평판이 결정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던진다.
바로 이 의문으로부터 '아서 플렉'과 '루퍼트 펍킨'의 논리적 오류와 망상은 철저히 쇄파된다. 절대적인 것은 없고 상대적인 것만 있다면, 그래서 자신에게 코미디가 되는 것을 상대방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아서'가 무고한 시민들을 죽인 행위와 '펍킨'이 스타 코미디언을 납치한 행위 또한 '코미디' 또는 '코미디적 혁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영화가 던지는 이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가다 보면, 그들의 범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사회 혁명을 꿈꾸고 코미디의 체제 혁명을 시도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류의 보편적인 인권과 생명에 위배된다면, 그 코미디적 혁명은 결코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4. 믿는다는 것, 무엇이 진짜일까?
'루퍼트 펍킨'의 상상(망상)과 실재 사이에는 어떤 간격이 존재할까? 영화는 '펍킨'이 머릿속으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상황을 상상하는 신으로 채워진다. 그가 스타 코미디언 '제리'와 식사하며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과, 집구석에서 상상으로 '제리'와의 식사를 재현하는 장면, 그가 '제리'의 사무실에서 직접 대화하고, '제리'가 그를 칭찬함과 동시에 목을 조르며 '당신의 코미디가 너무 부럽다'라고 말하는 장면 등은 의심의 여지없이 '펍킨'의 망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눈여겨볼 만한 점은 스콜세지 감독이 '펍킨'의 망상 장면을 연출할 때 대부분 'TV 스크린으로 송출되는 저화질 화면 효과'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TV 속에 비치는 '펍킨'의 이야기는 대부분 거짓이며 망상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연인과의 결혼식 장면, 결말부에 '펍킨'이 인기 코미디언으로서 대성공을 거두는 장면 등, 스콜세지 감독은 '펍킨'의 망상을 표현할 때에는 모두 저화질의 TV 화면 효과로 연출했다. 사실 모든 TV프로는 '허구'이며, 코미디의 본질도 '허구'에서 나온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감독의 이러한 연출은 치밀하도록 훌륭하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애초에 '펍킨'이 경험했던 모든 사건이 망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망상의 시퀀스들이 영화 속에서 사실에 해당하는 이야기들과 잘 조직되어 한 편의 '실재'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영화와 연기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더 중요한 것은 망상에 해당하는 장면에서도 배우는 실제로 연기했으며 영화의 모든 장면은 실제 대사의 발화와, 관념의 시청각적 형상화로 완성되었다는 사실로 압축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영화 자체가 '허구'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또 한 번 더 뒤집는다면, 영화를 찍기 위해 발화된 대사와 배우들의 연기는 분명 1983년 당시 실제로 발현되었던 역사적 사실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허구일까? 그것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떠한 대상이 실재이든 허구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실재라고 생각하는(믿는) 것이 곧 실재인 것이다. 믿음의 대상은 실재일 수도 있고 허구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그 대상을 실재라고 믿는 순간 그것은 그 사람의 관념 체계 안에서만큼은 정말로 실재가 된다.
결국, 모든 것은 '믿음'의 문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무언가 하나씩은 믿으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과학이든, 영향력 있는 지식인의 철학이든, 자신의 신념이든, 특정 종교의 신이든, 온 우주와 자연을 설계한 절대적 창조자이든, 사람은 믿음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영화에서도 믿음이란 관념은 'Believe', 'Faith', 'Trust' 등의 단어와 대사로 빈번하게 발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믿음 체계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는 분명히 실재한다. 지금까지 논의한 '실재(實在)'의 사전적 정의 또한 '사람의 의식에서 독립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실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던 것이 실제로는 완전한 거짓일 가능성도, 사람이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이 우주 너머에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절대적 창조자가 있을 가능성도, 그 어느 것 하나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에 관한 한, 인류는 지금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허구를 실재라고 단단히 믿어버리고, 그것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정말로 실재가 되어 세상 밖에서 실제로 발현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게 허구인 것들이, 허구인 것들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쌓여 거대하고 무서운 '실제 세상'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허구를 믿는 믿음이 만들어낸 세상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영원한 '진리'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을 찾아가는 고된 여행이 바로 삶이기도 하니까. 백 년 남짓한 짧은 여정이 끝나고 나면, 그 뒤에는 또 얼마나 길고 영원한 것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 경이로운 궁금증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